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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바다』#2, 칼 슈미트

『땅과 바다』 지난 번 갈피에 이어지는 곳에서 저자는 땅에 의해 규정된 “토착적인autochthonen” 민족들과 대비해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 존재함을 말하는데, 그러면서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 “해착적”이란 말이 생소해서 두 낱말의 의미를 환기하게 됐는데, “토착적”이라는 말은 그 뜻처럼 우리말의 땅에 정초돼 있어. 그래서 그 말의 대구(對句)로 “해착”도 금세 장착되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라? 두 낱말의 한자가—“土着”과 “海錯”, ‘붙을 착(着)’과 ‘어긋날 착(錯)’으로 다른 글자네?! 아아, 땅에는 착 달라붙을 수 있지만 바다는 그렇지가 않지... 와, 그런데 그걸 ‘어긋난다’고 하다니! 그 번역에 감탄하면서 원문의 독일어 뜻풀이가 궁금해지네. 일단 한자를 더 보자면, 錯은 ‘착’음으로는(‘둘 조’로 새기기도 해.) ‘어긋나다’라는 뜻 외에 ‘섞다’, ‘섞이다’, ‘어지럽히다’ 등의 뜻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종이에 펜으로 교차하는 두 직선을 그려보자.(이것은 어긋남인가? 만남인가?) 그 다음, 이 그림을 물에 담가보자. 차차 종이에 물이 스며들고 잉크가 번지고 전체적으로 흘렁흘렁해지면서 직선이 곡선이 되고 아예 평면을 벗어나 산산이 흩어진다 — 문득 상상해보는 거야. 실제로 실험하면 어떻게 될지... 종이 재질과 두께, 잉크 종류, 물 온도 등에 따라서 꽤 달라지지 않으려나. 여튼 이 상상 속에서 어긋남은 자연스레 서로 섞이는 것이 되는데, 학습으로 익혔거나 본능으로 각인된 물의 속성이 그렇게 상상하도록 이끄는 듯해. 흐르며 풀어지게 하는 물의 속성 —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다른 것들을 띄워주고 흐르게 하며, 물질의 내부 결합을 느슨하게 해서 다른 것들과 섞일 수 있도록 매개하는 속성이 말야. 물의 이런 물리·화학적 성질을 두고, 노자는 최고의 선善이자[上善若水] 도道와 같다 했어. 


바다는 이런 물의 도道에 힘입어 최초로 생명을 잉태했지. 생명체는 물에 각인됐고 모든 몸은 물로 인해 유사해. 우리는 때때로 물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파동을 일별하곤 하는데 —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물에 대해 고착固着된, 그야말로 토착土着적인 상像은 아닐까? 칼 슈미트를 따라 “땅의 인간”으로서 “저 대양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는 건, 그 비교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는 세계와 언어, 그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지극히 제한된 것임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유용하지만(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과 스웨덴 영화 <경계선>의 주인공들이나 몇 편의 SF에서 펼쳐지는 외계와 만날 때 그렇듯 (그런데, 앞의 소설과 영화가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각각 호수와 바다, 즉 물 원소가 중요한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공통점! 스칸디나비아라는 지역은 어떤 곳인지?!)), 그 사이거나 한 존재에 내재한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결들을 품기에는 단순한 도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말하듯 과거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어류인간”이라 할 만큼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었을까? 많은 시간을 흔들리는 배-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땅에서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달리는 사람들의 감각과 사고는 어떤 부분이 얼마나 다르고 어떤 부분이 얼마나 비슷할까?(가령 현대 이전 여러 지역에서 강도나 살인에 대한 처벌이 어땠는지 비교한다면? (어떤 부족에서는 아들을 살해한 자를 양자로 들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어.)) 다르다면 그 다름과 다른 점들은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나? 또한 다름에 주목했을 때와 닮음에 주목했을 때 무엇이 다른가? 이런 걸 생각함으로써 무엇이 얻어지나? (((블라블라 게거품))) 어류인간까지 가지 않아도 아주 아주 조금 다름으로도 파악할 수 없이 다른 세계가 생성돼 있는가 하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물학적 토대를, 더 나아가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도 해. 그래서 이와 연관된 생각이란 것은 곧바로 교착交錯 상태에 빠지게 마련인가 싶다가, 다시 그런 어깃장 하나 하나를 정성스레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가...“해착海錯”이란 말이 그러네. 사전에는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어. 그렇지만 이 글에선 글자 각각을 직역해 풀게끔 쓰인 걸로 보이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고 섞이며 어지러워졌어. 또 이게 육지와 비교했을 때 개개의 것들이 보다 입체적으로 위치하고 이동하는 바다 공간의 특성과 연결되기도 하면서... 저자와 역자가 이 말에 담아낸 “바다적 실존”을 상상-음미하고 있어.



사람들은 존재의 원천을 물에서 찾은 이론의 창시자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밀레의 탈레스Thalēs(기원전 500년경)라고 말하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탈레스보다 더 오래되고 동시에 더 새로운 견해란다. 말하자면 영원하다는 거지. 지난 19세기에는 위대한 스타일을 지닌 독일의 학자 로렌츠 오켄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바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어. 다윈주의적 자연학자가 만든 진화계보도에도 어류와 육지동물들이 다양한 계열로 상호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관계 맺고 있어. 바다 생명체가 인간의 조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거야. 인류의 근원사나 초기 역사도 인류가 대양에서 기원했음을 확증해주지 않니? 저명한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토착적인autochthonen”, 즉 땅에서 태어난 민족들 말고도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 다시 말해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한 번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고, 견고한 땅을 그들의 순수한 바다적 실존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로만 여긴단다. 남태평양 섬들과 폴리네시아의 해양민족들, 카낙Kanak과 사우Sawu 섬의 토착민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그런 어류인간Fischmenschen의 종족이라고들 말하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떠올리는 세계, 그들의 언어는 전부 바다와 관계되어 있어. 견고한 땅에서 얻어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땅의 인간들Landmenschen에게 저 순수한 대양인간Seemenschen의 세계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다름 아니지.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10~11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바다책_갈피>는 "바다숲 알리기"의 일환으로, 관련 책에서 발췌한 구절을 공유하는 코너예요. 무수히 많은 책들의 숲에서 바다, 섬, 바다숲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건져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