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책_갈피>는

<바다책_갈피>는 "바다숲 알리기"의 일환으로, 관련 책에서 발췌한 구절을 공유하는 코너예요. 무수히 많은 책들의 숲에서 바다, 섬, 바다숲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건져서 올립니다.


결혼해서 큰딸 막 낳고 스물여덟 살 무렵이었다. 보따리 장사를 하는 친한 언니가 나주 남평에 간다길래, 나도 해본다고 따라갔다. 옷장에 넣는 소독약, 나프탈렌을 파는데 쉽지 않았다. 한 개도 못 팔고 나무 아래서 울고 있었다. 애기 떼놓고 와서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근처 파출소장이 나를 불러서 소독약 한 바구니를 사주더니 “관청으로 다니라”면서 이런저런 요령을 알려줬다. 그렇게 내 보따리 장사가 시작됐다. 남편은 원양어선을 탔고, 나도 뭐든 벌어야 했다.

 

소독약은 봄 한 철 장사라 다른 계절 팔거리도 고민해야 했다. 양말을 떼서 완도도 가고 신안도 갔다. 그 시절 신안 군청이 목포에 있었다. 군청 드나들면서 물건을 파는데 안면 익힌 공무원들이 섬으로 발령 받아 가더라. 그 직원들 궁금해 따라가다 보니 어느 틈에 나도 신안만 돌아다니게 됐다. 처음 들어간 섬이 증도, 임자도였다. 벌써 45년이 넘었다.

 

신안 사람들이 참 잘해줬다. 내가 새댁일 때 짐가방 들고 가면 동네어머니들은 ‘아따, 내 딸아 왔냐’ 이러면서 반겨줬다. 증도면사무소에 젊은 키다리 직원은 친절하고 뭐든 하나라도 꼭 사주곤 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니 박우량 군수가 되어 있더라(웃음).

 

신안이 교통이 사나웠고, 나는 뱃멀미가 심했다. 담배 얻어서 연기를 코에 좀 대면 견딜 만 했다. 예전엔 뱃시간도 길었다. 대여섯 시간 씩 타고 가면 도착할 즈음엔 거의 송장이 됐다. 주의보 뜨면 며칠씩 섬에 있었다. 낮에 물건 팔고 저녁에는 주로 혼자 사는 엄마들 집에 묵었다. 엄마들은 공짜로 잠 재워주고 밥도 줬다. 허기져도 미안하니까 ‘밥 먹었어요’ 하기도 했다. 할머니들께는 긴 때타월이나 건강식품이라도 꼭 챙겨드렸다.

 

흑산도에 가거도까지 다녔다. 흑산도 ‘50번 홍어집’ 언니네서도 자주 잤다. 아저씨가 죽고 혼자 사는 언닌데 나는 오전 9시 넘어야 관공서에 들어가니까 그 전에 언니 장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럼 언니가 “아따, 니가 장사꾼이라 장사 잘한다” 그랬다.

 

맨 처음엔 007가방을 들고 시작했다. 관청이다 보니까 카메라도 팔리고 일제 소니녹음기, 산요면도기 등등 나름 고가품도 팔렸다. 이후 큰 가방을 양쪽에 들고 다녔고, 나중엔 바퀴 두 개짜리 수레를 끌고 다녔다. 이 멍청이가 운전을 못하니까 양손에 들고 밀고 다닌 거지. 나중에는 양말도 팔고 옷도 팔았다. 홍도에 커피 팔면서 혼자 살던 언니가 있었는데 어렵게 살면서도 내 물건을 제일 잘 사줬다.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광주 전대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병문안을 다녔다.

 

지금은 짐가방을 항구터미널에 맡겨놓고 아는 사람들이랑 시간 보내기도 한다. 옛날에 비하면 놀러 다니는 셈이다. 오메가쓰리, 영양크림, 신발 옷 등등 원하는대로 주문 받아 사다준다. 내가 사이즈 다 아니까.

 

이 장사로 아이 넷을 다 키웠다. 젊을 땐 돌아다니느라 잘 몰랐는데 세월이 흘러보니 아이들 어릴 때 옆에 못 있어 준 게 미안하고 아쉽다. 내가 섬으로 일 갔을 때 남매끼리 양림동 덕림산 언덕에서 깻잎 따다가 된장에 찍어먹고 그랬다더라. 딸 아이 하나는 24살에 죽었다.

 

장사 같이 다닌 언니들하고 살고 싶어 신안 안좌면에 집을 알아보고 있다. 예전엔 장산면에도 잠시 지냈다. 그리고 내 주소지는 도초면이다. 코로나 땜에 섬 못 가니 답답하다. 얼른 가고 싶다.

 

『 신안소식』 2020 가을호 특집 “신안 만인보”3회에 실린 보따리 장수 김우돌씨(이혜영 정리)

(발췌 : 현지예)

예전에는 근사한 담뱃갑이 많았어. 그 중에 물 내뿜는 흰수염고래가 그려진 게 있었지. 언젠가 그 이미지와 함께 올라온, 대체 담배와 고래가 무슨 상관이길래 묻는 글을 기억해. 거기 댓글에, 담배 연기 내뿜는 모습이 고래가 수증기를 뿜는 모습과 닮았다, 고래가 심연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게 우리가 담배 태울 때 촤악 가라앉는 그 기분이 아니겠냐 하는 얘기들이 있었어. 나는 세 번째론가 댓글을 달았는데, filter. 흰수염고래가 먹이 먹을 때 필터링을 하잖아요 였어. 담뱃갑에 버젓이 “FILTER CIGARETS”라고 쓰여있기도 해서 확신에 차서 답했지. 담배 필터가 발암 물질들 걸러주는 걸 꽤 근사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담배회사의 디자인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저 우연의 일치였던 것 같아. 여튼 난 그 디자인이 좋았는데 당시에 담뱃갑 동물그림 반대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어. 이후 흡연 경고 그림이 부착되고 두 번 정도 패키지 리뉴얼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도 고래는 고래더라.



지난번에 고래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했었는데, 과거 서구 고래사냥꾼들 중에는 고래를 적대시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경우가 많았나봐. 고래잡이는 생사가 걸려 있는 일이었으니까. 고래들을 포획하고 죽이는 것이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자체가 위험한 작업이었지. 고래들 역시 살아남으려 했을 테니 서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겠지. 하지만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고래잡이들은 또 달라서, 알래스카 축치족은 매해 고래의 영혼을 기리는 잔치를 벌이기도 했어. 그 때마다 새로 지은 노래를 불렀다고 해. 노래를 지을 때는 등잔불을 전부 꺼두어야 했는데, 그 어둠 속 침묵을 부르는 이름도 있었어. 이러한 적대감과 경외감 둘 다 직접적인 관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친밀함이었다고 봐. 현대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우리들로서는 알 수 없지. 현재 고래사냥은 미묘한 문제지만, 대부분 인간들에게 고래는 다른 세계의 존재거나 막연히 신비한 동물일 뿐이야. 그런데 공포가 동반되지 않는 신비란 뭘까? 


고래도 사냥을 해. 오늘은 고래“의” 사냥에서 행해지는 폭풍 흡입, Gulf! 


영어로 걸프(Gulp)란 말은 꿀꺽하고 크게 한 모금 삼키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또한 ‘목구멍에 쑤셔 넣다, 삼키다, 쭉 들이키다’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고래를 탐구하는 고래학자(Cetologe)의 언어에서 이 말은 긴수염고래들의 먹이 섭취 동작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가족을 이루며 참고래과보다는 짧은 수염을 가졌지만, 대신 아래쪽에 필요에 따라 엄청나게 늘릴 수 있는, 주름처럼 깊게 패인 특징적인 긴 골이 나 있다. 긴수염고래가 크릴새우 떼를 만나면, 녀석은 멱에 있는 제 먹이주머니를 거대하게 부풀리며 먹이 저장통으로 만든다. 잠시나마 녀석이 턱에 열기구를 물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턱이 수면 위에서 좍 벌어지면서 고래는 한꺼번에 엄청난 양을 한 모금 삼켜서-바로 이것이 걸프다!-수백 파운드나 되는 크릴새우나 다른 미세한 것들을 섭취한다. 턱이 다시 닫히면서 물은 수염을 통해 빠져나가고 플랑크톤은 걸려서 남게 된다. 이러한 것을 두고 걸프 동작(Gulp-Verfahren) 혹은 삼켜서 걸러먹기(Schluckfiltieren)라고 말하며, 이는 모든 긴수염고래과 고래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수십 억에 이르는 갑각류 물고기, 살파류, 연충들과 해파리들이 이렇게 해서 가야할 곳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바로 걸프를 통해서!


살아있는 것을 먹을 때의 문제점은 이것이 얌전히 접시 위에 놓인 채로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들이 도망가려는 시도를 하면서 일이 복잡해진다. 접시 위의 감자, 채소 그리고 고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간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굶은 채 잠자리에 들거나 아니면 도망가는 음식을 다시 한데로 몰아야 할 것이다. 긴수염고래가 이와 유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자 녀석은 이 문제를 해결할 기발한 계책을 개발했다. 일례로 혹등고래는 크릴새우 떼의 아래로 깊숙이 잠수해 들어간 다음, 나선형을 그리며 위로 휘돌아 올라오면서 이 갑각류 주의를 빙빙 돈다. 그러면 이때 물거품이 생겨나 고리 모양을 이루게 된다. 크릴새우에게 이렇듯 부글거리는 것은 으스스한 것이기 때문에 녀석들은 가깝게 뭉쳐지며 밀착한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만들어진 이 원통 모양의 공기방울 창살 안에 갇힌 꼴이 되어서, 그곳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녀석들이 능력껏 헤엄쳐 도망가려하기도 전에 걸프가 행해진다. 


거 참, 고래답군.


프랭크 섀칭, 『바다를 통한 시간여행』, 정재경, 오윤희 옮김, 영림카디널(2011), p.402~403

(발췌/코멘터리 : 현지예)


지난 갈피는 고래의 진화 이야기였는데, 오늘날과 같은 고래와 돌고래가 출현하기 시작한 건 대략 500만 년 전이라고 해.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판이 근접하던 5천만 년 전쯤에 파키세투스가 그 사이 테티스 해변으로 돌아온 후 아주 긴 시간이 흘렀지. 그 동안 대륙이 융기하며 바다였던 곳이 히말라야 산맥이 되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판게아가 분리되기 이전 고생대 말에 시작, 1억 년에 걸쳐 펼쳐진 척추동물 상륙작전과 비교하면 그 절반 정도 시간밖에 안 걸린 셈이야. 육지에서 한 2~3억 년 살았나, 연달아 쓴 너무 큰 숫자들이 감각이 안 되어서 그림을 그려봤더니 꼬부라진 게 지팡이를 닮았네.


인류와 생명의 진화, 지구와 우주의 역사, ‘빅 히스토리’라고도 하는 이런 이야기에 매료되곤 해. 바다책_갈피에 소개한 것들이 그런 이야기들. 나 자신을 인간 종 차원에서 생각하고 의식이나 마음의 진화와 포개어 음미하면 내가 아주 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져. 그러면 세계와 다른 존재들과의 유대를 느낄 때가 있어. 아득함. 그것은 그 거리를 뛰어넘는 어떤 기적을 예감하게 해서 아름다워. 그 기적은 꼬부라진 궤적을 그리며 되돌아와, 작지만 경계가 흐려진, 경계 없이 옹골찬 자기의 느낌. 그러면 조금 떨어진 곁에서 수런거리는 다른 존재들이 들려와.


모든 존재는 언어를 가진다고 생각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말을 하지. 안 그럼 우리가 어떻게 파키세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을 알 수 있었겠어. 그러니 고래야 말해 뭐해. 그들은 생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와 다를 수 있지만 느끼고 말한다는 건 같아. 그 의미들을 잘 알 순 없지만 그런 게 있다는 건 알 수 있어. 마음 기울이면 그 의미도 조금은.




고래가 노래까지 큰소리로 흥얼거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르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다. 혹 고래 자신들이 그 노래를 듣고는 펄쩍 놀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래가 내는 신음이나 울음소리에서 멜로디를 구성해내는 것이 유행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심지어 어떤 고래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에 대한 목록까지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바다 포유동물이 매 계절마다 음성의 순서를 뒤바꿔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비밀이나 신비로운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대양의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색다른 암호나 메시지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곧 우리가 저녁에 명상하면서 듣곤 하는 부드러운 CD 소리도 수중의 일상에서 들으면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크게 들리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고래 연구가가 교미를 하려는 수컷의 사랑노래나 혹은 경쟁 수컷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고 할 때의 소리를 측정해보니 150에서 180데시벨 사이였다. 그 정도면 군부대 비행장의 활주로 옆에 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사실 모든 고래들이 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혹등고래만이 이 비법의 히트곡을 부를 수 있다.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나 참고래는 그에 비해 초저주파 불가청음으로 소리 지르고, 귀신고래는 낡은 마루청이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규모가 큰 혹등고래 무리들마다 모두 자기 무리에 속한 녀석들을 대체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도록 만드는 각각의 고유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포유동물은 요즈음 일종의 문화 교류와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해안에서 채집한 최신 유행가 소리를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에다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대왕고래, 참고래, 밍크고래, 보리고래, 브라이드고래, 그리고 혹등고래 등등의 긴수염고래과에 속하는 고래들의 말소리들은 방언으로 서로서로 구분된다. 동태평양에서는 서쪽에서보다 삐걱대는 듯한 고래 소리가 더 걸걸하게 민중적으로 들리고, 대서양에서는 인도양에서와는 다른 음열(音列)로 들린다. 그러한 것들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게 뭐든 간에, 종마다 전형적인 레퍼토리 혹은 생동감 있고 발전가능성 있는 언어인 ‘고래말(Walisch)’이 있는 것이다.


프랭크 섀칭, 『바다를 통한 시간여행』, 정재경,오윤희 옮김, 영림카디널(2011), p.400~401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2~3억 년 전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땅이 하나의 커다란 바다에 둘러싸인 모습이었어. 판게아Pangaea라고 불리는 초대륙이 있었던 건데, 판게아는 pan[범汎]-gaia, ‘모든 땅’ 혹은 '지구 전체'라는 뜻이야. ‘가이아’가 그리스 태초의 여신이자 생명의 모태인 대지를 뜻하니, 어떻게 보면 “범신汎神”이기도 하네. 그런데 판게아가 최초로 형성된 초대륙은 아니야. 대륙은 약 35억 년 전 생겨난 이래 하나로 뭉쳤다 뿔뿔이 흩어졌다를 반복해왔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어. 다시 汎이라는 한자를 음미하니, 물 위에 떠서 물결 따라 널리 널리 떠도는 가이아라는 이미지가 선명해져. 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고, 계속해서 자기 뿐 아니라 바다와 서로서로 모습과 위치를 바꾸고 있고, 그러면서 지구 생명의 양식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말이야.



판게아로부터 분리된 대륙판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살펴보면, 인도대륙이 유달리 빨리 움직였어. 작달막해서 그런 건지 저 아래 남극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와 주욱 북상했더라고. 그러고 약 5천만 년 전에 유라시아 대륙판과 만나서 서로 짜부러지며 서로를 들어올렸지. 그게 히말라야. 그 습곡 작용 역시 오랜 기간 이루어져서 8백만 년 전쯤에야 지금과 같은 산맥 지형이 되었다고 해. 히말라야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티벳에서는 “초모랑마”라고 부르는데, “세상의 어머니 여신”이란 뜻이야.


초모랑마 8천m 부근에는 옐로우 밴드라고 하는 노란 석회암 층이 나타나. 거기서 조개나 산호 화석이 발견되지.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만나기 전에 그 사이에 바다가 있었거든. 그 바다를 “테티스 해”라고 불러. 역시 그리스 여신 이름인데, 그리스에는 테티스라는 이름의 여신이 둘 있어. 아킬레우스의 엄마였던 바다 님프 쪽이 더 알려지긴 했지만 이쪽은 Thetis고, 테티스 바다랑 같은 Tethys는 그 할머니뻘 되는 티탄족 여신, 바로 가이아의 딸이야. 그녀의 오빠이자 남편은 오케아노스, ocean의 어원이지. 테티스 해는 고생대 후기에서 신생대에 이르기까지 대략 지금의 지중해에서 히말라야, 그리고 아시아에 걸쳐 있던 길고 얕은 바다였대. 그러니까 히말라야의 옐로우 밴드는 테티스 해 바닥에 있던 퇴적암의 흔적이지. 또 다른 흔적은 잔존하는 바다들이고 그 중 하나가 지중해地中海야. 크레타 섬을 비롯해 고대 여신 문화가 꽃피었던 곳.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판게아를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바다를 판탈라사Panthalassa라고 하는데, 탈라사Thalassa는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여신, 특히 지중해 여신을 일컫지. 


아홉 번째 바다책_갈피는 판-가이아와 판-탈라사가 몇몇 조각으로 나뉘며 생겨났던 테티스 해가 계속해서 작아지고 얕아지고 따뜻해지던 때에, 그 해변을 거닐던 어떤 동물이 전하는 이야기로 시작해. 


혹등고래가 부르는 세이렌의 노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수수께끼 같은 돌고래의 미소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잘 아는 범고래들은 온 바다에 무슨 소식을 전하고 다니는 것이며, 길이가 33미터나 나가는 흰긴수염고래의 두개골에는 태곳적의 어떤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신비스런 바다의 포유동물들이 우리한테 알려줄 것은 무엇일까?


비의를 믿는 자들의 말이지만, 주의하라!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멍, 멍!”이라고.


그 동물이 전하는 소식을 재구성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한 마리의 개였다. 아니면 뭐, 외모가 개와 비슷하기도 했지만 또 오늘날의 작은 우제류(偶蹄類) 가축들을 약간 닮았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나는 우제류처럼 짝수의 발굽을 지닌 핀셔(사냥개의 일종)와 같은 동물로서, 진화가 낳은 벼락 출세자였던 셈이다. 또 말하자면 쥐라기 공원이 주연배우들이 없어져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뒤로 역사의 그늘을 과감히 헤치고 나온 포유류의 하나였다. 나는 외계의 존재와 결부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폐증 어린이를 고쳐준다거나 혹은 텔레비전 시리즈물에서 어릿광대짓을 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또 내가 목이 쉬도록 짖어댄다고 해도 아무도 진지하게 명상에 젖어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리 윌리>에 열광하면서 자연 상태 그대로의 당당한 돌고래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과거로 여행을 해본 자라면 여지없이 나와 마주치게 되었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파키스탄의 얕은 바다나 냇물 혹은 웅덩이에서 진흙을 뒤집어쓰고 뒹굴면서 작은 가축들을 사냥하여 먹었다. 또한 끔찍하게도 고된 작업이었지만 수중에서도 음파의 전달을 들을 수 있도록 내 청각을 바꿔놓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수중에서 조금밖에 들리지 않으며 물 위에서도 그렇게 잘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나마 완전히 백치와 같은 꼴이 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들린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자리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자리냐고? 그거야, 고래가 되는 것이지! 애완동물이라고는 하지만 횟감이 되거나 종교 대용물이 되거나 하는 중간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끊임없이 절멸의 위험 속에 내놓인 꼴이 되게 생겼다. 다 털어놓자면, 나는 바로 고래의 조상이 파키세투스(Pakicetus)였다.


(중략)


파키세투스가 정확히 언제 살았는지는 100퍼센트로 정확하게 그 기간을 꼽아볼 수가 없다. 추정컨대 녀석이 발전해 갔던 기간은 5,200만 년 전에서 4,800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였다. 세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호주 대륙이 결국 남극 대륙과 작별하면서 좀더 따뜻한 수역을 찾아 나섰다. 인도 대륙은 아시아 대륙에 부딪쳐 충돌을 일으키며 티베트의 고산지대를 치솟게 했다. 테티스 해는 점점 더 좁아져 가다가 얕은 바다나 바다와 단절된 저수지들이 여기저기 늘어선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 저수지에는 육지에 서식하는 동물들이 간혹 뛰어들기도 했는데, 이처럼 가끔씩 물고기의 날을 가져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 녀석들도 꽤 있었다.


고래는 그럼 대체 어느 혈통에 더 가까운가 하는 문제에 대해 오늘날 분자생물학자와 형태론 연구자들은 서로 껴안고 있는 상태이다. 후자들은 사멸해버린 유제류(Huftier, 有蹄類, 발굽을 가진 동물)의 한 부류인 메소니키아(Mesonychier)를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며, 분자생물학자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하마를 녀석의 삼촌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근자에 파키스탄에서 나온 뼈 유적은 분자생물학자의 손을 들어주는 듯 보인다. 확실한 것은 고래의 조상들도 단일한 계통에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여러 계통에서 나란히 발전해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결론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화석은 5,350만 년 전에 히말라야 남부에 살았던 녀석의 아래턱 조각으로서, 이 때문에 녀석은 발음하기도 힘든 히말라야세투스 수바투엔시스(Himalayacetus subathuensis)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죽은 자가 어찌 싫다고 거스를 수 있겠는가. 수바투 층군에서 나온 히말라야 고래가 정말 모든 고래의 조상이며 또 파키세투스 과에 귀속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암불로세투스(Ambulocetus)도 이처럼 ‘수영하며 달리는 고래’라는 제 명칭을 대하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 추정컨대 암불로세투스는 파키세투스 뒤로 50만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등장했지만 직계 후손은 아니고 오히려 사촌쯤 되는 녀석이다. 길이가 4미터나 나가는 몸집으로 녀석은 무슨 일에라도 대뜸 덤벼들고는 했다. 외모를 보면 늑대보다는 차라리 행운의 푸흐르가 깨끗이 면도를 하고 난 모습을 상기시킨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면 수달과 악어의 잡종을 떠올리며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녀석은 수달처럼 헤엄쳐 다녔으며 악어처럼 아열대의 열기를 지닌 호숫가나 얕은 바다에 엎드려 있었고, 물속에서는 위쪽 높이 자리 잡은 눈만 수면 위로 빼꼼히 내놓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바로 이 점에 많은 육지 서식 동물들이 물  속으로 들어갔던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메뉴가 여러 가지로 더 많아지게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물은 또한 위장하는 데에도 아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암불로세투스의 잠정적인 먹잇감들은 그게 설령 여러분이었더라도 아마 틀림없이 녀석이 있는 수역에 상당히 가까이까지 다가가고는 했을 것이다. 끈질기게 추격해 오기에는 녀석의 뒤뚱거리는 발이 적합하지 못해 보였다. 너무 길쭉한데다가 물갈퀴까지 달려 있었다. 그 대신 녀석은 천생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일생을 관조 속에서 보냈다. 


프랭크 섀칭, 『바다를 통한 시간여행』, 정재경,오윤희 옮김, 영림카디널(2011), p.214~218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추석 연휴 이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어. 연휴에 강원도 지인 집에 머무르면서 들과 강, 산과 바다를 누비다가 서울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인지 정신이 없어. 한 이틀은 너무 피곤한데다 눈알이 뻑뻑하고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는 증상에 안과에 갔더니 안구건조증이라고 인공눈물을 처방해줬어. 모처럼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적응했던 눈이 노트북과 휴대폰 화면에 피로를 느낀 걸까? 여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다가, 전에 두 갈피 올렸던 책 접힌 곳을 펼쳐서 필사했어.

 

옮겨 적었다거나 베껴 적었다라고 하지 않고 ‘필사’라고 한 것은, 이전에 <필사적 퍼포먼스>라는 작업을 했어서 이 단어와 친애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야. 여기서 ‘필사’는 筆寫이자 必死. 죽을힘을 다해/죽음을 각오하며 베껴 쓰는 퍼포먼스였지. 그 당시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 2018년 요맘때 아기를 낳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서 책을 읽게 되었어. 그중 엄마-작가들이 ‘엄마됨’에 관해서 쓴 글을 모은 책이 있었는데, 엄마됨을 둘러싼 폭력들을 드러내는 폭력적인 글들이었지. 글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 시적이면서 현실적이었으니까. 그런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2019년 10월 10일 임산부의 날에 당시 일하던 송파산모건강증진센터 벽에 필사하는 퍼포먼스를 했지. 연습 같은 거 없고 그냥 한 거였는데, 글을 타이핑하다보니 엄마-작가들의“분노와 애정”(그 첫 책 제목)이 온몸으로 흘러오고 흘러오고 하는 거야. 어떨 땐 하염없이 눈물이 났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꼿꼿하게 앉아서 필사를 해가는 게 좋았어.

 

그 이후 점점 더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 일상적으로 필사를 해. 글과 보다 직접적으로 만나고 싶을 때, 글귀를 내안에 새기고 싶을 때,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 실은 바다책_갈피 하면서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었어. 좋은 글에 사족을 다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글이든 뭐든 자기가 직접 만나야 좋은 건데, 내 설명이나 감상 같은 것이 그걸 저해하는 것 같았어. 무언가를 만나게 됐을 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렇게 만나게 된 자기 상황이 거기 작용하는 건데 말이야. 또한 이런 글들로 바다숲, 섬, 바다에 관해 뭘 알(릴) 수 있다는 거냐 라는 부끄러움도 있었어. 이번 갈피가 이와 닿는 이야기이기도 해. 내가 한 얘기와는 영 다른 ‘고래사냥’에 관한 거지만, 당시의 그건 인간과 고래의 ‘필사적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겠어. 3중의 의미로 말이지. 필사적이라는 건 '나'와 '너'가 대면한다는 거야.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고래 사냥꾼이라면 자신의 항해일지에 쓰지 않을 것들에 대해 쿡 선장은 책을 썼다” 이 부분 너무 통쾌해! 쿡 선장이나 나나!!



1914~1918의 세계대전 이래 “해수(海水)적pelagischen” 포획법이라는 이름하에서 생겨나 점점 정교해진 고래잡이 기술은 더 이상 사냥은커녕 포획이라고도 부를 수 없어. 오늘날에는 전기 기계장치, 대포, 화약, 정찰기, 음향 및 무선 감지기로 무장한, 항해하는 주방이기도 한 3만 톤에 육박하는 거대 선박들이 남극의 빙하로 향하지. 고래들이 그리로 도망가기 때문이고, 죽은 고래들을 배 위에서 즉시 산업적으로 가공하기 위해서야. 이 속도라면 불행한 리바이어던은 얼마 안 가 우리 행성에서 거의 사라져버릴 거야. 마침내 1937년과 1938년 런던에서 고래 포획에 일정한 규제를 가하고, 포획 구역의 구분 등을 합의한 국제협약이 체결되지. 아직 살아남은 고래들만이라도 이 무분별한 근절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이와 비교해보면, 내가 말하는 고래 사냥꾼들은 단순한 포획꾼도, 그렇다고 기계적인 고래도살자도 아닌 진정한 사냥꾼들이었어. 그들은 북극이나 대서양 연안에서 범선과 노 젓는 보트를 타고 광활한 세계 바다의 공간들을 관통해 사냥감을 쫓지. 이 사냥꾼들이 강하고 영리한 바다 거구와 싸움을 벌일 때 쓰는 무기란 고작해야 손으로 던지는 작살이었어. 말하자면 이것은 동물학적 분류상의 물고기가 아닌 두 생명체들이 바다의 원소 속에서 움직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던 거야. 당시 이 싸움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수단이라고는 근육의 힘으로 움직이는 돛과 노, 그리고 죽음을 부르는 발사체인 작살이 전부였단다. 고래는 꼬리를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보트와 배를 산산조각낼 정도로 강해. 인간의 계략에 수천 가지 계략으로 맞서기도 하고. 수년간 포경선 수병으로 일한 바 있던 허먼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 싸움의 과정에서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에 거의 “개인적인 관계”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미묘한 적대와 동지적 결합이 어떻게 맺어지는지 묘사하고 있어. 바다에 사는 다른 생명체와의 이런 투쟁을 통해 인간은 점점 해상적 실존의 원소적 깊이까지 빠져들게 되었던 거야.


고래물고기 사냥꾼들은 지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범선을 타고 항해했어. 늘 베일에 가려진 고래의 경로를 쫓으면서 섬과 대륙을 발견해도 그를 떠벌리지 않았지. 멜빌의 소설에서 항해자 중 한 명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쿡 선장의 책을 읽더니 이렇게 말하지. 고래 사냥꾼이라면 자신의 항해일지에 쓰지 않을 것들에 대해 쿡 선장은 책을 썼다고. 미슐레는 인간에게 해양을 계시해준 것이 누구인가라고 묻지. 누가 해양의 지대와 해로를 발견하였나? 한마디로, 누가 지구Erdball를 발견하였는가? 고래와 고래물고기 사냥꾼들이야! 콜럼버스 없이도, 북쪽이나 브르타뉴와 바스크 출신의 어부들이 먼저 발견한 것을 소란스럽게 재발견할 뿐인 유명한 금 채집자들 없이도 이 모든 것을 행했던 거야. 계속해서 미슐레는 이 고래물고기 사냥꾼들이야말로 인간의 용기를 가장 숭고하게 표현한다고 덧붙이지. 고래물고기가 없었더라면 어부들은 언제까지고 해안에만 들붙어 있었을 거야. 고래가 그들을 유혹해 해양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해안에서 해방시켰던 것이지. 고래를 통해 인간은 해류를 발견하고 북쪽의 관통로를 발견했어. 고래가 우리를 안내했던 거야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38~42.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신기했다. 할머니, 그 아래 할머니, 또 그 아래 할머니로 쭉 이어진 오래된 노래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게. 사람들이 모여서 그 노래를 다 같이 배우는 모습도 신기했다.

 

장산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방과 후 수업으로 장산도 들노래를 배웠다. 처음에는 학교 선생님이 알려줬다. 장산도에만 있는 귀한 노래라고 했다. 들노래 담당 선생님이 섬을 떠나면 다른 선생님이 들노래를 가르쳐줬다. 마을에서 노래를 하는 할머니, 할어버지가 오셔 “이 부분은 목소리를 키워라” 하고 고쳐줬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들노래를 배우고 공연을 했다.

 

어르신들이 노래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줬다. 나를 ‘장산도 꼬마 노래꾼’이라고 했다. 노래 부르는 게 굉장히 재밌다. 장산도들노래는 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노래다. 모 찌고, 모 심으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나는 논에 풀(김)을 다 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르는 ‘길꼬내기’가 가장 흥이 나고 좋다. 긴 노래가 끝나는 대목이라 나도 농사를 다 끝낸 것 같아 뿌듯하다.

 

장산도 들노래를 부르면 시골의 정이 느껴진다. 이 섬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느껴진다. 노래는 자기 마음과 흥을 말과 가락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농사짓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내 이야기 같아진다. 이런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춤추고, 모내기 시늉도 하고 따라서 불러준다.

 

6학년 때부터 사물놀이를 시작했고 꽹과리를 잡았다. 들노래는 꽹과리에 맞춰 노래를 한다. 그러다보니 꽹과리 소리를 늘 들어왔다. 꽹과리는 징, 북, 장구보다 멜로디가 경쾌해서 좋다. 치는 재미가 있다. 장산중학교는 전교생 16명이 매주 모여 사물놀이를 연습한다. 점심 먹고 다 같이 놀고, 다 같이 국악을 하는 것이 무척 좋다. 나는 부쇠(상쇠 다음의 두 번째 꽹과리 주자) 역할인데 부담감도 있다. 꽹과리가 틀리면 음악이 멈춘다.


『신안소식』 2020 가을호 특집 “신안 만인보”3회에 실린 장산도 들노래꾼 선민제(김창헌 정리) 부분 발췌 



오랜만에 바다책_갈피. 작년 신안 초행길에 읽었던 <신안소식>을 펼쳐 들었어.

 

그날 아침 용산역 가는 길 요란했지. 모처럼 여행에 남편과 아기의 배웅까지 받았는데, 엉뚱한 버스를 타더니 도중에 내려서도 두 번이나 더 잘못 환승했지 뭐야. 그렇게 쳇바퀴 돌다가 택시로 갈아타려고 내린 반포대교 남단은 횡단보도 하나 없었으니―8차선 도로를 무단으로 내달려 중앙차선에서 두어 차례 지랄발광―반대편에서 기적적으로 서준 택시에 홍해에 당도한 모세의 심정―다시 욕 두 바가지 먹으며 무단 횡단―친절한 기사님의 느리지만 빠른 주행 덕에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곳에 무려 3분이나 남기고 안착―이랬지. 그러고 책가방에서 꺼내든 게 <신안소식>이었어.

 

“신안 만인보”를 읽는데, 사람 사람 사람 소식들에 와 와 너무 좋은 거야.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 소탈한 글들에, 중간 중간 울컥하며 가슴이 뜨뜻해졌어. 그 중에 장산도 들노래꾼 아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저기 옮긴 글귀들을 읽을 때 그 노래 그 마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일 거야. 들노래의 내력이 읊어지는 듯 했고 그중 어떤 부분들이 나에게까지 이어져 오는 듯 했어. 보따리 장사하는 김우돌씨 이야기도 그랬는데, 글로 말하고 있는 것을 내가 그대로 받는 것 같았어. 좀 충격을 받았었어. 읽기 전엔 무심결에 그저 그런 ‘잡지’려니 하지 않았겠니. 그런데 좋아서,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다 보니 말할 수 없이 좋았지. 사람들 취재하고 이렇게 정리해 쓴 사람들도 대단해.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생생하게 전할까?


만인보 글들은 힘이 있어. 참 소탈한데, 소탈함과 소통의 ‘소疏’는 사이사이 성김. 그래서 그 틈새들로 뭐가 오고 가고 하나봐. 그러며 읽는 이의 마음도 열어주나봐. 마음 뿐 아니라 몸도 움직여줘. 그래서 얼마 전엔 <신안 만인보 展> 보러 자은도까지 다녀왔지. 그 전시가 열린 것도 마찬가지로 만인보의 영향력. 참, 거기서 만인보 최근호들을 봤는데, 이제는 만인보萬人譜에 인간들 뿐 아니라 수국이랑 천일염도 실렸더라. 그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몹시 맘에 들었어. 그들 기세와 자부심에 얼마나 유쾌해졌는지!



지주식 김 양식에 쓰이는 성긴 그물에 걸려 있던 그림들 글들. <신안 만인보 展>은 "신안 만인보"에 소개된 이야기를 국내외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며 만들어져 신안 자은도 둔장미술관에서 열렸다(8/13~9/5).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덮고 있는 바다는, 평균 수심은 약 3.7㎞, 지구 전체 바닷물 양은 약 13.5억㎦로, 넓고 깊고 많은 공간 이미지를 갖고 있어. 하지만 인간 관점에서 그렇고, 지구 입장에서 바다는 “얇은 막에 불과한 존재”라 할 만큼 그 양이 그리 많지가 않아. 한 잡지*에서 이러한 “바다의 얇음”을 삶은 계란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지구 반지름(약 6400㎞)에 대한 바다의 평균 수심(약 3.7㎞)의 비율은 약 0.058%로, 삶은 계란(계란 반지름 3㎝, 계란 껍데기 두께 약 0.3㎜, 난간막 약 0.07㎜)으로 치면 껍데기 깔 때 보이는 반투명한 막보다도 훨씬 얇은 수준이라는 거야.


그럼 그 아래는? 맨틀은 아래로 갈수록 물성이 연하긴 해도 고체니까, 바다 아래 땅이 있는 건가? 외핵은 액체, 내핵은 고체(내핵은 온도가 외핵보다 높지만 엄청나게 큰 압력이 작용해서 분자가 활발히 움직이지 못하고 고체 상태로 있게 돼. 녹는점이 훨씬 높아진다고 볼 수도 있지.)라는데, 그럼 다시 바다에 이르고 또 다시 땅에 이른다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렇진 않아. 바다나 강이 지구 표면을 살짝 덮고 있는 물인 것처럼, 땅이라는 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을 이르는 거거든. 결국 ‘땅과 바다’라는 구도는 그야말로 ‘피상적인’ 관점인 거지. 지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심오한 곳이야.  


하지만 ‘표면’이야말로 존재하는 것의 토대가 아닌가? 생물학적 막이나 사회·문화적 경계가 대체로 어떤 존재를 규정하면서 바깥과 교류하게 하는 장소이듯이, 이 얄팍한 땅과 바다는 지구 정체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대부분의 지구 생물에게는 오랜 기간 세상의 전부와 같았어. 인간의 경우 오지랖이 꽤나 넓어져서 여기저기 답작대긴 하지. 땅을 파고 고층 빌딩을 세우더니 38.5만㎞ 떨어진 달에도 다녀왔고, 무인우주선이긴 하지만 두 대의 보이저 탐사선들이 현재 1,2호 각각 22700000000㎞, 18800000000㎞ 정도 떨어진 태양계 밖에서 소식을 보내오고 있어. 그렇더라도 인간의 서식지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제한적이고, 해저는 맨몸으론 수심 100m 정도까지 내려갔다 올라올 수 있을 뿐이야. 그것도 영화 <그랑블루>의 쟈끄와 엔조처럼 매우 숙련된 프리다이버의 경우에나. 


태양광 중에 파장이 짧아서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파랑이나 남색이 바로 “그랑 블루”야. 영화의 엔딩씬에서 주인공 쟈끄가 사라지는 심해의 푸른 어둠이지만, 그조차 사라져 빛이 아예 들지 않는 수심 약 1000m 이하는 어떤 면에선 우주보다도 미스테리한 곳이야. 물론 최근에는 잠수 조사선이 수심 1000m 훌쩍 아래까지 유/무인으로 내려가서 그곳의 물리적 환경이나 (광합성에 의존하지 않는) 생태계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니, 인간은 표면의 심오함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까. 그리고 그 심오함의 추구는 어쩐지 계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날계란을 열수 분출공(해저에 침투한 바닷물이 마그마에 의해 뜨거워져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가지고 들어갔더라고. 예상과 달리 계란은 엄청난 수압에도 깨지지 않았고 반숙으로 익었다고 해.   


오늘은 “달이 떨어져나간 자리”일지도 모르는 태평양의 창조 신화를 소개할 거야. 남태평양의 깊은 바다 속에 하필 또 계란의 세계가 있다고 하네. 계란 세계 속에서도 한 구석에 웅크린 최초의 여자가 아이들을 낳아. 달(!), 물고기, 새, 바위, 바람, 지식, 침묵, 이런 것들이 태어나면서 계란 내외부가 채워지고 깊어지더니, 땅위에는 어느 새 사람들이 생겨나 있어. ‘이야기’라는 건 ― 특히 최초의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서 누가 누구로부터 태어났고, 이름과 종과 성별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일을 맡는지 등등 아주 피상적인 것에 관해 말해. 대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고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우리 껍데기 말야. 인간은 이런 껍데기쯤 하찮게 취급하거나 벗어나고픈 굴레로 여기며 심오한 본질을 찾지만 껍데기야말로 본질적인 것, 존재의 조건이 아닐까? — 그러한 표면의 깊음을 이야기해. 그래서 이야기는 아직도 종종 마음이라는 또 하나의 표면을 찌르고 어루만지나봐.


* 첫 번째와 네 번째 문단은「Newton highlight 바다의 탄생, 해류와 기상, 해양 자원부터 심해의 세계까지 바다의 모든 것」(2017)의 내용을 참조함.



먼 옛날 남태평양 어느 곳에 최초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바로 바다의 여신입니다. 최초의 여자는 바로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영원한 침묵의 나라에 있는 계란의 세계 한구석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아주 좁은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좁은가 하면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이렇게 좁은 곳에서 무려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세 명은 왼쪽 옆구리로 낳았고 나머지 세 명은 오른쪽 옆구리로 낳았습니다. 가장 먼저 낳은 아이는 최초의 남자 달 신이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달 신이 태어난 뒤 아이가 크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세로로 나눠 왼쪽은 물고기, 오른쪽은 사람의 모습을 가진 물고기 남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영원한 침묵의 나라 계란 속에서 태어난 달 신이 바다의 바깥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달 신은 그곳에 이름을 붙이고 자기 집으로 삼았습니다. “이 곳을 ‘밝은 달 아래’라고 부르겠어.”


최초의 여자가 오른쪽 옆구리로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물고기를 돌보는 신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신이 사는 집은 달 신이 사는 곳의 바로 아래에 있는 신성한 섬이었습니다. 물고기 신은 그 섬에 있는 큰 연못에 사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물고기 신도 달 신처럼 오른쪽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왼쪽은 멸치의 모습을 한 물고기 남자였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물고기 신이 사는 신성한 섬의 바로 아래에 있는 붉은 앵무새의 깃털 나라에 살았습니다. 네 번째 아이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허공에 있는 회색 바위의 나라에 살았습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집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이 아이에게 바람이 가득 든 자루를 주었는데 그 바람은 훗날 다섯 번째 아이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사람들을 돕거나 여러 가지 지식을 알려주는 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에게는 지평선 끝에 구멍을 하나 뚫어주어 그곳을 통해 지나다니게 했습니다. 


막내인 여섯 번째 아이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영원한 침묵의 나라에 살며 어머니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경덕, 『바다 너머 세상을 보여주는 남태평양신화』, 공수진 그림, 현문미디어(2006), p.10~14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땅과 바다』 지난 번 갈피에 이어지는 곳에서 저자는 땅에 의해 규정된 “토착적인autochthonen” 민족들과 대비해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 존재함을 말하는데, 그러면서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 “해착적”이란 말이 생소해서 두 낱말의 의미를 환기하게 됐는데, “토착적”이라는 말은 그 뜻처럼 우리말의 땅에 정초돼 있어. 그래서 그 말의 대구(對句)로 “해착”도 금세 장착되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라? 두 낱말의 한자가—“土着”과 “海錯”, ‘붙을 착(着)’과 ‘어긋날 착(錯)’으로 다른 글자네?! 아아, 땅에는 착 달라붙을 수 있지만 바다는 그렇지가 않지... 와, 그런데 그걸 ‘어긋난다’고 하다니! 그 번역에 감탄하면서 원문의 독일어 뜻풀이가 궁금해지네. 일단 한자를 더 보자면, 錯은 ‘착’음으로는(‘둘 조’로 새기기도 해.) ‘어긋나다’라는 뜻 외에 ‘섞다’, ‘섞이다’, ‘어지럽히다’ 등의 뜻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종이에 펜으로 교차하는 두 직선을 그려보자.(이것은 어긋남인가? 만남인가?) 그 다음, 이 그림을 물에 담가보자. 차차 종이에 물이 스며들고 잉크가 번지고 전체적으로 흘렁흘렁해지면서 직선이 곡선이 되고 아예 평면을 벗어나 산산이 흩어진다 — 문득 상상해보는 거야. 실제로 실험하면 어떻게 될지... 종이 재질과 두께, 잉크 종류, 물 온도 등에 따라서 꽤 달라지지 않으려나. 여튼 이 상상 속에서 어긋남은 자연스레 서로 섞이는 것이 되는데, 학습으로 익혔거나 본능으로 각인된 물의 속성이 그렇게 상상하도록 이끄는 듯해. 흐르며 풀어지게 하는 물의 속성 —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다른 것들을 띄워주고 흐르게 하며, 물질의 내부 결합을 느슨하게 해서 다른 것들과 섞일 수 있도록 매개하는 속성이 말야. 물의 이런 물리·화학적 성질을 두고, 노자는 최고의 선善이자[上善若水] 도道와 같다 했어. 


바다는 이런 물의 도道에 힘입어 최초로 생명을 잉태했지. 생명체는 물에 각인됐고 모든 몸은 물로 인해 유사해. 우리는 때때로 물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파동을 일별하곤 하는데 —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물에 대해 고착固着된, 그야말로 토착土着적인 상像은 아닐까? 칼 슈미트를 따라 “땅의 인간”으로서 “저 대양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는 건, 그 비교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는 세계와 언어, 그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지극히 제한된 것임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유용하지만(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과 스웨덴 영화 <경계선>의 주인공들이나 몇 편의 SF에서 펼쳐지는 외계와 만날 때 그렇듯 (그런데, 앞의 소설과 영화가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각각 호수와 바다, 즉 물 원소가 중요한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공통점! 스칸디나비아라는 지역은 어떤 곳인지?!)), 그 사이거나 한 존재에 내재한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결들을 품기에는 단순한 도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말하듯 과거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어류인간”이라 할 만큼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었을까? 많은 시간을 흔들리는 배-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땅에서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달리는 사람들의 감각과 사고는 어떤 부분이 얼마나 다르고 어떤 부분이 얼마나 비슷할까?(가령 현대 이전 여러 지역에서 강도나 살인에 대한 처벌이 어땠는지 비교한다면? (어떤 부족에서는 아들을 살해한 자를 양자로 들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어.)) 다르다면 그 다름과 다른 점들은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나? 또한 다름에 주목했을 때와 닮음에 주목했을 때 무엇이 다른가? 이런 걸 생각함으로써 무엇이 얻어지나? (((블라블라 게거품))) 어류인간까지 가지 않아도 아주 아주 조금 다름으로도 파악할 수 없이 다른 세계가 생성돼 있는가 하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물학적 토대를, 더 나아가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도 해. 그래서 이와 연관된 생각이란 것은 곧바로 교착交錯 상태에 빠지게 마련인가 싶다가, 다시 그런 어깃장 하나 하나를 정성스레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가...“해착海錯”이란 말이 그러네. 사전에는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어. 그렇지만 이 글에선 글자 각각을 직역해 풀게끔 쓰인 걸로 보이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고 섞이며 어지러워졌어. 또 이게 육지와 비교했을 때 개개의 것들이 보다 입체적으로 위치하고 이동하는 바다 공간의 특성과 연결되기도 하면서... 저자와 역자가 이 말에 담아낸 “바다적 실존”을 상상-음미하고 있어.



사람들은 존재의 원천을 물에서 찾은 이론의 창시자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밀레의 탈레스Thalēs(기원전 500년경)라고 말하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탈레스보다 더 오래되고 동시에 더 새로운 견해란다. 말하자면 영원하다는 거지. 지난 19세기에는 위대한 스타일을 지닌 독일의 학자 로렌츠 오켄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바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어. 다윈주의적 자연학자가 만든 진화계보도에도 어류와 육지동물들이 다양한 계열로 상호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관계 맺고 있어. 바다 생명체가 인간의 조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거야. 인류의 근원사나 초기 역사도 인류가 대양에서 기원했음을 확증해주지 않니? 저명한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토착적인autochthonen”, 즉 땅에서 태어난 민족들 말고도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 다시 말해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한 번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고, 견고한 땅을 그들의 순수한 바다적 실존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로만 여긴단다. 남태평양 섬들과 폴리네시아의 해양민족들, 카낙Kanak과 사우Sawu 섬의 토착민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그런 어류인간Fischmenschen의 종족이라고들 말하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떠올리는 세계, 그들의 언어는 전부 바다와 관계되어 있어. 견고한 땅에서 얻어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땅의 인간들Landmenschen에게 저 순수한 대양인간Seemenschen의 세계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다름 아니지.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10~11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옛날부터 바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인간이 체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어. 바다는 뭍에 사는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지. 육지에 비해 시시각각 변화무쌍하지만 그 속은 알 수 없으니까. 그 두려움이 구체화돼서 해신 신앙이나 바다괴물 전설 같은 게 생겨나기도 했겠고, 심해에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들이 괴물로 오인되기도 했지. 대표적으로 (지금 와선 유명무실해진) 고래나 대왕오징어가 그랬어.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엔가 대왕오징어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불길한 징조라고 토막 내 바다에 버렸다고 해. 


작년 바다숲 살리기 캠페인 시작할 때 바다숲의 “가시화”를 당면 과제로 받아 안았어.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으니 바다숲이란 게 있기는 한 건지 실감도 안 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데이터가 너무 없는 실정이니까. 그런데 따옴표를 친 표현들과 “바다숲의 가시화”라는 방식에는, 바다 밖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스탠스나 ‘시각’ 이외 다른 감각들이 퇴화한 인간 감각체계의 실태가 내포돼 있어서, 우리가 무언가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하게 해. 바다에서 수영이나 서핑 같은 걸 하면서 발 딛을 바닥이 없다거나, 몸을 에워싼 물의 압력과 저항, 부력과 물결을 이용해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라는 식으로, 뭍의 기준으로 비교함으로써 가능한 체험을 하며 잠시 머무를 뿐이 아닌가 하는. 오늘 소개할 책에 나오는 관점을 따르면, ‘땅’이라는 “원소”가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고 있기에(그러고는 과연 그렇기만 한가라고 반론을 펼치는 격이긴 해.) 그렇다고 할까.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세계사(서구 유럽 문명)를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풀어내는데, 책 첫머리에, 인간이 그 거주지를 이루는 주요 “원소”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사유가 흥미로워.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지각체계나 인간들끼리의 관계 등이 아니라 ‘원소’의 각인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물질적 상상력을 인간들이 지극히 인간적으로 아웅다웅하는 한복판에 갖다 놓은 것이. 또한 인간의 감각과 생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두려워서) 미개하고 불길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바다의 힘을 대지의 힘과 대등한 차원으로 (감히(?)) 끌어올린 것도.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때는 보통 좋지 않은 경우야. 뭔가 잘못되었을 때, 아플 때. 그렇다고 원래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좋은 걸까? 바다숲, 플랑크톤, 바이러스, 무의식 같은 것들은 신비하기도 하지만 죄나 질병의 이미지와도 연결이 돼. 죄나 질병은 죄의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뭔가를 보여주려고 나타나는 측면이 있어. 난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느껴. 바다 사막화를 비롯해 점점 더 가시화되는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현 상황을, 우리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있던 것들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국면으로 보고 있어. 이것을 얼마만큼 인식하느냐에 따라 상황의 또 다른 차원이 열리지 않을까 하고.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견고하게 정초된 대지 위에 서서 걸어가고 움직이지. 그 대지가 그가 서 있는 곳이자 그의 토대다. 그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시점을 얻으며, 이것이 그가 받는 인상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지. 가시범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걷고 움직이는 형태, 그 형상도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 위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얻어진 거야. 그렇기에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있고, 땅은 4분의 1 뿐이라 사실상 가장 큰 대지도 섬처럼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대지-지구(地球)Erde”라고 부르고 있지. 대지Erde가 구(球)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이 별을 “대지 공Erdball” 또는 “대지 구슬Erdkugel”이라 부른단다. 이런 방식으로 “대양 공Seeball”이나 “바다 구슬Meereskugel”과 같은 것을 떠올리는 건 어딘가 어색하지? 우리의 모든 존재, 행복과 불행, 기쁨과 고통은-누군가에게는 지상의 낙원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상의 눈물골짜기이기도 하겠지만-어쨌든 모두 “지상의irdische” 삶이지. 여러 민족들의 가장 오래된 기억과 깊은 시련을 표현하고 있는 신화와 전설들에서 대지Erde가 인간의 위대한 어머니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대지는 신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신으로 지칭되지. 성경은 인간은 대지로부터 왔고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 대지가 인간의 모성적 토대라면 인간은 대지의 아들이고, 사람들은 대지의 형제이자 대지의 시민들인 셈이야. 대지(흙), 물, 불, 공기라는 전승된 4원소론에서 대지(흙)가 인간에 상응하고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원소인 것도 이 때문이야.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인간이 대지를 통해 각인되어 있는 정도만큼이나 다른 원소들에 의해서도 각인되어 있다는 생각은, 얼핏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 물고기도, 새도 아니고, 그런 게 존재하기나 한다면 불로된 존재도 아닌 인간에게 무슨 소리냐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렴.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핵심에 있어 순전히 대지적erdhaft이고 대지와만 관계하며, 다른 원소들은 그저 대지에 덧붙여진, 부차적 지위만 갖는 것일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단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대지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생각보다 많이 제기되고 있으니 말이야. 해변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넓이의 바다가 너의 시선의 지평을 둘러싸고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해변가에 서 있는 인간이, 당연한 말이지만, 땅에서부터 바다를 바라보지, 바다에서 땅을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않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인간의 기억 속에서 물과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비밀스러운 원천Urground인데 말이야. 대부분 민족들의 신화와 전설에는 대지에서 태어난 신과 인간 뿐 아니라, 바다에서 탄생한 신과 인간도 등장하지. 또 바다Meeres와 대양See의 아들, 딸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도 있단다. 여성적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지. 그런데 바다는 이 외의 다른 자식들도 낳았단다. 나중에 우리는 “대양의 자식들”을 비롯해서, 거품에서 탄생한 미녀라는 멋진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만적인 “대양 주름잡이들”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야. 거기에서 우리는 불현 듯 대지나 견고한 땅과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된단다.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7~9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여러분은 바다를 찾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옛날에 바다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에 바다에 머물렀던 흔적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태아였을 때 양수에 에워싸여 듣던 소리, 어머니의 혈액이 흐르는 소리는 바다에서 잠수할 때 듣는 파도소리와 흡사하다고 해. 그로부터 먼 훗날 크게 앓던 밤 잠결에 파도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스으-ㅂ 파- 스으-ㅂ 파- 바다가 들고 바다가 나는 리듬, 리듬... 바다는 들숨이 깊은가... 나도 코가 뻥 뚫리네... 다음날 깨어 보니, 옆 사람이 자면서 숨 쉬는 소리더라고.


흙과 돌과 풀로 덮인 땅 아래도 그렇지만 우리 몸 안에도 “바다의 단”이 있어. 호흡, 심장박동, 내장운동 같은 걸 생각해보면, 우리 몸이 바다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런가? 뭔가 그런 것도 같고 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 — 이 뭔가를 감각하는 것, 그런 감수성을 살리는 것이 바다숲을 살리는 것과 연관되지 않을까.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이 “뭔가”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이야. 바다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딛고 그걸 넘어가는.


  

여러분은 바다를 찾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옛날에 바다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륙으로 1500km쯤 들어간 곳이라 하더라도, 마음 속의 눈과 귀에 먼 과거의 그 유령 같은 물결과 파도 소리를 재현시켜 주는 증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펜실베니아 주의 어느 산에 올랐을 때, 나는 하얀 석회암 위에 앉아 거기서 수조 개나 되는 아주 미세한 해양 동물 껍데기 모양을 발견했다. 이들은 한때 이곳을 뒤덮고 있던 대양 속에서 살다가 죽어 갔고, 그 석회질 유해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은 암석으로 변했고, 바다는 후퇴했다. 그러고 나서 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지각이 비틀리면서 암석이 위로 솟아올라 긴 산맥의 기반이 된 것이다.

 

플로리다 주의 에버글레이즈 대소택지 깊숙한 곳에서 나는 갑자기 바다의 느낌이 밀려드는 것에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바다와 똑같은 편평함, 무한한 공간, 하늘과 그 위에서 움직이고 변하는 구름이 이곳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밟고 서 있는 딱딱한 암석질 바닥 여기저기에 울퉁불퉁한 산호암이 삐죽 나와 있고,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따뜻한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산호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지금은 그 바위는 풀과 물로 살짝 덮여 있다. 그러나 이 땅이 아래에 있는 바다의 단을 덮고 있는 아주 얇은 층에 불과하며, 언제라도 그 과정이 역전되어 이곳이 다시 바다로 변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사방에서 전해져 왔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육지에서 과거에 그곳에 바다가 존재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이충호 옮김, 양철북(2017), p.154~155

(발췌/코멘터리: 현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