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책_갈피>는

<바다책_갈피>는 "바다숲 알리기"의 일환으로, 관련 책에서 발췌한 구절을 공유하는 코너예요. 무수히 많은 책들의 숲에서 바다, 섬, 바다숲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건져서 올립니다.

지구 표면의 약 70%를 덮고 있는 바다는, 평균 수심은 약 3.7㎞, 지구 전체 바닷물 양은 약 13.5억㎦로, ‘넓고 깊고 많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고, 지구 입장에서는 “얇은 막에 불과한 존재”라 할 만큼 그 양이 그리 많지가 않다. 한 잡지*에서 이러한 “바다의 얇음”을 삶은 계란에 빗대어 설명하길, 지구 반지름(약 6400㎞)에 대한 바다의 평균 수심(약 3.7㎞)의 비율은 약 0.058%로, 삶은 계란(계란 반지름 3㎝, 계란 껍데기 두께 약 0.3㎜, 난간막 약 0.07㎜)으로 치면 껍데기 깔 때 보이는 반투명한 막보다도 훨씬 얇은 수준이라는 것.

 

그럼 그 아래는? 맨틀은 아래로 갈수록 물성이 연하긴 해도 고체이므로, 바다 아래 땅이 있는 건가? 외핵은 액체, 내핵은 고체(내핵은 온도가 외핵보다 높지만 엄청나게 큰 압력이 작용하여 분자가 활발히 움직이지 못하고 고체 상태로 있게 된다. 녹는점이 훨씬 높아진다고 볼 수도 있다.)라는데, 그럼 다시 바다에 이르고 또 다시 땅에 이른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바다나 강이 지구 표면을 살짝 덮고 있는 물인 것처럼, 땅이라는 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을 이르는 거니까. 결국 ‘땅과 바다’라는 구도는 그야말로 ‘피상적인’ 관점인 거다. 지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심오한 곳이다.

 

하지만 ‘표면’이야말로 존재하는 것의 토대가 아닌가. 생물학적 막이나 사회·문화적 경계가 대체로 어떤 존재를 규정하면서 바깥과 교류하게 하는 장소이듯, 이 얄팍한 땅과 바다는 지구의 정체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대부분의 지구 생물에게는 오랜 기간 세상의 전부와 같았다. 인간의 경우 오지랖이 꽤나 넓어져서 여기저기 답작대기를, 땅을 파고 고층 빌딩을 세우더니 38.5만㎞ 떨어진 달에도 다녀왔고, 무인우주선이긴 하지만 두 대의 보이저 탐사선들이 현재 1,2호 각각 22700000000㎞, 18800000000㎞ 정도 떨어진 태양계 밖에서 소식을 보내오고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서식하는 장소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제한적이고, 해저는 맨몸으론 수심 100m 정도까지 내려갔다 올라올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영화 <그랑블루>의 쟈끄와 엔조처럼 매우 숙련된 프리다이버의 경우에나 말이다.

 

태양광 중 파장이 짧아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파랑이나 남색이 바로 “그랑 블루”, 영화의 엔딩씬에서 주인공 쟈끄가 사라지는 심해의 푸른 어둠이지만, 그조차 사라져 빛이 아예 들지 않는 심해(수심 약 1000m 이하)는 어떤 면에선 우주보다도 미스테리한 곳이다. 물론 최근에는 잠수 조사선이 수심 1000m 훌쩍 아래까지 유/무인으로 내려가 그곳의 물리적 특성이나 생태계(광합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를 연구하고 있으니, 인간은 표면의 심오함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까. 그리고 그 심오함의 추구는 어쩐지 계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날계란을 열수 분출공(해저에 침투한 바닷물이 마그마에 의해 뜨거워져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실험이 있었고, 예상과 달리 계란은 높은 수압에도 깨지지 않았고 반숙으로 익었다고 한다.

 

오늘은 “달이 떨어져나간 자리”일지도 모르는 태평양의 창조 신화를 소개한다. 남태평양의 깊은 바다 속에 하필 또 계란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계란 세계 속에서도 한 구석에 웅크린 최초의 여자가 아이들을 낳는다. 달(!), 물고기, 새, 바위, 바람, 지식, 침묵, 이런 것들이 태어나면서 계란 내외부가 채워지고 깊어지더니, 땅위에는 어느 새 사람들이 생겨나 있다. ‘이야기’라는 건 — 특히 최초의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서 누가 누구로부터 태어났고, 이름과 종과 성별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일을 맡는지 등등 아주 피상적인 것에 관해 말한다. 대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고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우리 껍데기. 인간은 이런 껍데기쯤 하찮게 취급하거나 벗어나고픈 굴레로 여기며 심오한 본질을 찾아 헤매지만 껍데기야말로 본질적인 것, 존재의 조건이다. ― 그러한 표면의 깊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아직도 종종 마음이라는 또 하나의 표면을 찌르고 어루만지는 듯하다.

 

* 이 글 첫 번째와 네 번째 문단은 「Newton highlight 바다의 탄생, 해류와 기상, 해양 자원부터 심해의 세계까지 바다의 모든 것」(2017)의 내용을 참조했다.



먼 옛날 남태평양 어느 곳에 최초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바로 바다의 여신입니다. 최초의 여자는 바로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영원한 침묵의 나라에 있는 계란의 세계 한구석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아주 좁은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좁은가 하면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이렇게 좁은 곳에서 무려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세 명은 왼쪽 옆구리로 낳았고 나머지 세 명은 오른쪽 옆구리로 낳았습니다. 가장 먼저 낳은 아이는 최초의 남자 달 신이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달 신이 태어난 뒤 아이가 크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세로로 나눠 왼쪽은 물고기, 오른쪽은 사람의 모습을 가진 물고기 남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영원한 침묵의 나라 계란 속에서 태어난 달 신이 바다의 바깥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달 신은 그곳에 이름을 붙이고 자기 집으로 삼았습니다. “이 곳을 ‘밝은 달 아래’라고 부르겠어.”


최초의 여자가 오른쪽 옆구리로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물고기를 돌보는 신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신이 사는 집은 달 신이 사는 곳의 바로 아래에 있는 신성한 섬이었습니다. 물고기 신은 그 섬에 있는 큰 연못에 사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물고기 신도 달 신처럼 오른쪽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왼쪽은 멸치의 모습을 한 물고기 남자였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물고기 신이 사는 신성한 섬의 바로 아래에 있는 붉은 앵무새의 깃털 나라에 살았습니다. 네 번째 아이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허공에 있는 회색 바위의 나라에 살았습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집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는 이 아이에게 바람이 가득 든 자루를 주었는데 그 바람은 훗날 다섯 번째 아이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사람들을 돕거나 여러 가지 지식을 알려주는 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에게는 지평선 끝에 구멍을 하나 뚫어주어 그곳을 통해 지나다니게 했습니다. 


막내인 여섯 번째 아이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영원한 침묵의 나라에 살며 어머니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경덕, 『바다 너머 세상을 보여주는 남태평양신화』, 공수진 그림, 현문미디어(2006), p.10~14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땅과 바다』 지난 번 갈피에 이어지는 곳에서 저자는 땅에 의해 규정된 “토착적인autochthonen” 민족들과 대비해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 존재함을 말하면서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이라는 표현을 한다. “해착적”이라는 생소한 말이 두 낱말의 의미를 환기해준다. “토착적”이라는 말이 그 뜻처럼 우리말의 땅에 정초돼 있어서 그 말의 대구(對句)로서 “해착”도 금세 장착되려 하는데, 가만, 두 낱말의 한자가—“土着”과 “海錯”. ‘붙을 착(着)’과 ‘어긋날 착(錯)’으로 다른 글자다. 아아 땅에는 착 달라붙을 수 있지만 바다는 그렇지가 않지, 그런데 그걸 ‘어긋난다’고 하다니! 그 번역에 감탄하면서 원문의 독일어 뜻풀이가 궁금해진다. 일단 한자를 더 보자면, 錯은 ‘착’음으로는(‘둘 조’로 새기기도 한다.) ‘어긋나다’라는 뜻 외에 ‘섞다’, ‘섞이다’, ‘어지럽히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종이에 펜으로 교차하는 두 직선을 그려보자.(이것은 어긋남인가? 만남인가?) 그 다음, 이 그림을 물에 담가보자. 차차 종이에 물이 스며들고 잉크가 번지고 전체적으로 흘렁흘렁해지면서 직선이 곡선이 되고 아예 평면을 벗어나 산산이 흩어진다 — 문득 상상해본 거다. 실제로 실험하면 어떻게 될지... 종이 재질과 두께, 잉크 종류, 물 온도 등에 따라서 꽤 달라지지 않으려나. 여튼 이 상상 속에서 어긋남은 자연스레 서로 섞이는 것이 된다. 학습으로 익혔거나 본능으로 각인된 물의 속성이 그렇게 상상하도록 이끄는 듯하다. 흐르며 풀어지게 하는 물의 속성 —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다른 것들을 띄워주고 흐르게 하며, 물질의 내부 결합을 느슨하게 하여 다른 것과 섞일 수 있도록 매개하는 속성이 말이다. 이러한 물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두고, 노자는 최고의 선善이자[上善若水] 도道와 같다 했다. 


바다는 이러한 물의 도道에 힘입어 최초로 생명을 잉태했다. 생명체는 물에 각인되었고 모든 몸은 물로 인해 유사하다. 우리는 때때로 물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파동을 일별하곤 한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물에 대해 고착固着된, 그야말로 토착土着적인 상像은 아닐까? 칼 슈미트를 따라 “땅의 인간”으로서 “저 대양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그 비교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는 세계와 언어, 그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지극히 제한된 것임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유용하지만(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과 스웨덴 영화 <경계선>의 주인공들이나 몇 편의 SF에서 펼쳐지는 외계와 만날 때 그렇듯 (그런데, 앞의 소설과 영화가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각각 호수와 바다, 즉 물 원소가 중요한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공통점! 스칸디나비아라는 지역은 어떤 곳인지?!)), 그 사이거나 한 존재에 내재한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결들을 품기에는 단순한 도식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듯 과거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어류인간”이라 할 만큼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이었을까? 많은 시간을 흔들리는 배-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땅에서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달리는 사람들의 감각과 사고는 어떤 부분이 얼마나 다르고 어떤 부분이 얼마나 비슷할까?(가령 현대 이전 여러 지역에서 강도나 살인에 대한 처벌이 어땠는지 비교한다면? (어떤 부족에서는 아들을 살해한 자를 양자로 들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다.)) 다르다면 그 다름과 다른 점들은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나? 또한 다름에 주목했을 때와 닮음에 주목했을 때 무엇이 다른가? 이런 걸 생각함으로써 무엇이 얻어지나? (((블라블라 게거품))) 어류인간까지 가지 않아도 아주 아주 조금 다름으로도 파악할 수 없이 다른 세계가 생성돼 있는가 하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물학적 토대를, 더 나아가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와 연관된 생각이란 것은 곧바로 교착交錯 상태에 빠지게 마련인가 싶다가, 다시 그런 어깃장 하나 하나를 정성스레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가. “해착海錯”이란 말이 그러하다. 사전에는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글자 각각을 직역해 풀게끔 쓰인 걸로 보이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고 섞이며 어지러워졌다. 또 이게 육지와 비교했을 때 개개의 것들이 보다 입체적으로 위치하고 이동하는 바다 공간의 특성과 연결되기도 하면서... 저자와 역자가 이 말에 담아낸 “바다적 실존”을 상상-음미해본다.




사람들은 존재의 원천을 물에서 찾은 이론의 창시자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밀레의 탈레스Thalēs(기원전 500년경)라고 말하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탈레스보다 더 오래되고 동시에 더 새로운 견해란다. 말하자면 영원하다는 거지. 지난 19세기에는 위대한 스타일을 지닌 독일의 학자 로렌츠 오켄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바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어. 다윈주의적 자연학자가 만든 진화계보도에도 어류와 육지동물들이 다양한 계열로 상호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관계 맺고 있어. 바다 생명체가 인간의 조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거야. 인류의 근원사나 초기 역사도 인류가 대양에서 기원했음을 확증해주지 않니? 저명한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토착적인autochthonen”, 즉 땅에서 태어난 민족들 말고도 “해착(海錯)적인autothalassische”, 다시 말해 순전히 바다에 의해 규정 받는 민족들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한 번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고, 견고한 땅을 그들의 순수한 바다적 실존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로만 여긴단다. 남태평양 섬들과 폴리네시아의 해양민족들, 카낙Kanak과 사우Sawu 섬의 토착민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그런 어류인간Fischmenschen의 종족이라고들 말하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떠올리는 세계, 그들의 언어는 전부 바다와 관계되어 있어. 견고한 땅에서 얻어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땅의 인간들Landmenschen에게 저 순수한 대양인간Seemenschen의 세계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다름 아니지.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10~11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고래로 바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인간이 체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육지에 비해 시시각각 변화무쌍하지만 그 속은 알 수 없는 바다는 뭍에 사는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고, 그 두려움이 구체화되어 해신 신앙이나 바다괴물 전설 같은 게 생겨나기도 했다. 심해에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들이 괴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지금 와선 유명무실해진 고래나 대왕오징어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엔가 대왕오징어가 발견된 적이 있다. 불길한 징조라 해서 토막 내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작년 바다숲 살리기 캠페인을 시작할 때 바다숲의 “가시화”를 당면 과제로 받아 안았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으니 바다숲이란 게 있기는 한 건지 실감도 안 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데이터가 너무 없는 실정이니까. 그런데 따옴표를 친 표현들과 “바다숲의 가시화”라는 방식에는, 바다 밖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스탠스나, ‘시각’ 이외 다른 감각들이 퇴화한 인간 감각체계의 실태가 내포되어 있어서, 우리가 무언가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바다에서 수영이나 서핑 같은 걸 하면서, 발 딛을 바닥이 없다거나 몸을 에워싼 물의 압력과 저항, 부력과 물결을 이용해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라는 식으로, 뭍의 기준으로 비교함으로써 가능한 체험을 하며 잠시 머무를 뿐이 아닌가 하는. 오늘 소개할 책에 나오는 관점을 따르면, ‘땅’이라는 “원소”가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고 있기에(그러고는 과연 그렇기만 한가라고 반론을 펼치는 격이긴 하다.) 그렇다고 할까.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세계사(서구 유럽 문명)를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풀어내는데, 책 첫머리에, 인간이 그 거주지를 이루는 주요 “원소”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사유가 흥미로웠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지각체계나 인간들끼리의 관계 등이 아니라 ‘원소’의 각인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물질적 상상력을 인간들이 지극히 인간적으로 아웅다웅하는 한복판에 갖다 놓은 것이. 또한 인간의 감각과 생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두려워서) 미개하고 불길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바다의 힘을 대지의 힘과 대등한 차원으로 (감히(?)) 끌어올린 것도.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때는 보통 좋지 않은 경우다. 뭔가 잘못되었을 때, 아플 때. 그렇다고 원래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좋은 걸까? 바다숲, 플랑크톤, 바이러스, 무의식 같은 것들은 신비하기도 하지만 죄나 질병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죄나 질병은 죄의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보여주려고 나타나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바다 사막화를 비롯해 점점 더 가시화되는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의 현 상황은, 우리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있던 것들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국면으로, 이것을 얼마만큼 인식하느냐에 따라 상황의 또 다른 차원이 열리지 않을까?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견고하게 정초된 대지 위에 서서 걸어가고 움직이지. 그 대지가 그가 서 있는 곳이자 그의 토대다. 그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시점을 얻으며, 이것이 그가 받는 인상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지. 가시범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걷고 움직이는 형태, 그 형상도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 위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얻어진 거야. 그렇기에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있고, 땅은 4분의 1 뿐이라 사실상 가장 큰 대지도 섬처럼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대지-지구(地球)Erde”라고 부르고 있지. 대지Erde가 구(球)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이 별을 “대지 공Erdball” 또는 “대지 구슬Erdkugel”이라 부른단다. 이런 방식으로 “대양 공Seeball”이나 “바다 구슬Meereskugel”과 같은 것을 떠올리는 건 어딘가 어색하지? 우리의 모든 존재, 행복과 불행, 기쁨과 고통은-누군가에게는 지상의 낙원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상의 눈물골짜기이기도 하겠지만-어쨌든 모두 “지상의irdische” 삶이지. 여러 민족들의 가장 오래된 기억과 깊은 시련을 표현하고 있는 신화와 전설들에서 대지Erde가 인간의 위대한 어머니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대지는 신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신으로 지칭되지. 성경은 인간은 대지로부터 왔고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 대지가 인간의 모성적 토대라면 인간은 대지의 아들이고, 사람들은 대지의 형제이자 대지의 시민들인 셈이야. 대지(흙), 물, 불, 공기라는 전승된 4원소론에서 대지(흙)가 인간에 상응하고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원소인 것도 이 때문이야.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인간이 대지를 통해 각인되어 있는 정도만큼이나 다른 원소들에 의해서도 각인되어 있다는 생각은, 얼핏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 물고기도, 새도 아니고, 그런 게 존재하기나 한다면 불로된 존재도 아닌 인간에게 무슨 소리냐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렴.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핵심에 있어 순전히 대지적erdhaft이고 대지와만 관계하며, 다른 원소들은 그저 대지에 덧붙여진, 부차적 지위만 갖는 것일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단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대지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생각보다 많이 제기되고 있으니 말이야. 해변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넓이의 바다가 너의 시선의 지평을 둘러싸고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해변가에 서 있는 인간이, 당연한 말이지만, 땅에서부터 바다를 바라보지, 바다에서 땅을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않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인간의 기억 속에서 물과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비밀스러운 원천Urground인데 말이야. 대부분 민족들의 신화와 전설에는 대지에서 태어난 신과 인간 뿐 아니라, 바다에서 탄생한 신과 인간도 등장하지. 또 바다Meeres와 대양See의 아들, 딸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도 있단다. 여성적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지. 그런데 바다는 이 외의 다른 자식들도 낳았단다. 나중에 우리는 “대양의 자식들”을 비롯해서, 거품에서 탄생한 미녀라는 멋진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만적인 “대양 주름잡이들”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야. 거기에서 우리는 불현 듯 대지나 견고한 땅과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된단다.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2016), p.7~9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여러분은 바다를 찾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옛날에 바다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에 바다에 머물렀던 흔적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아였을 때 양수에 에워싸여 듣던 소리, 어머니의 혈액이 흐르는 소리는 바다에서 잠수할 때 듣는 파도소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먼 훗날 크게 앓던 밤 잠결에 파도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스으-ㅂ 파- 스으-ㅂ 파- 바다가 들고 바다가 나는 리듬, 리듬... 바다는 들숨이 깊은가... 나도 코가 뻥 뚫리네... 다음날 깨어서 옆 사람이 자면서 숨 쉬는 소리였다는 걸 알았다. 


흙과 돌과 풀로 덮인 땅 아래도 그렇지만 우리 몸 안에도 “바다의 단”이 있다. 호흡, 심장박동, 내장운동 같은 걸 생각해보면, 우리 몸이 바다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가? 뭔가 그런 것도 같고 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 — 이 뭔가를 감각하는 것, 그런 감수성을 살리는 것이 바다숲을 살리는 것과 연관되지 않을까.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이 “뭔가”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이다. 바다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딛고 그걸 넘어가는.

 

  


여러분은 바다를 찾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옛날에 바다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륙으로 1500km쯤 들어간 곳이라 하더라도, 마음 속의 눈과 귀에 먼 과거의 그 유령 같은 물결과 파도 소리를 재현시켜 주는 증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펜실베니아 주의 어느 산에 올랐을 때, 나는 하얀 석회암 위에 앉아 거기서 수조 개나 되는 아주 미세한 해양 동물 껍데기 모양을 발견했다. 이들은 한때 이곳을 뒤덮고 있던 대양 속에서 살다가 죽어 갔고, 그 석회질 유해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은 암석으로 변했고, 바다는 후퇴했다. 그러고 나서 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지각이 비틀리면서 암석이 위로 솟아올라 긴 산맥의 기반이 된 것이다.

 

플로리다 주의 에버글레이즈 대소택지 깊숙한 곳에서 나는 갑자기 바다의 느낌이 밀려드는 것에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바다와 똑같은 편평함, 무한한 공간, 하늘과 그 위에서 움직이고 변하는 구름이 이곳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밟고 서 있는 딱딱한 암석질 바닥 여기저기에 울퉁불퉁한 산호암이 삐죽 나와 있고,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따뜻한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산호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지금은 그 바위는 풀과 물로 살짝 덮여 있다. 그러나 이 땅이 아래에 있는 바다의 단을 덮고 있는 아주 얇은 층에 불과하며, 언제라도 그 과정이 역전되어 이곳이 다시 바다로 변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사방에서 전해져 왔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육지에서 과거에 그곳에 바다가 존재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이충호 옮김, 양철북(2017), p.154~155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바다책_갈피>는 바다에 관한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책에서 찾고 발췌해 공유하는 코너. 오늘 ‘지구의 날’에는 지난번에 이어 “조석(潮汐)”에 관해 좀더 얘기하고 어여쁜 바다 벌레를 소개하려 한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최근에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까지 내려져 혼란한 와중이지만, 잠시 귀 기울여 “싱그러운 메시지”를 들어보자. 내가 기울면 언제나 들려 온다. 지구처럼 기우뚱, 몸을 기울여 듣는 시간이 많아지길 바란다. 


지난번 책갈피는 달이 떨어져 나간 상처자리에 물이 들어찬 게 태평양이라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동해나 황해의 조석은 대부분 이 태평양의 조석이 전파되어 들어온 것이다. 달과 태양 등에 의한 기조력으로 동해와 황해 내부에서 발생하는 조석도 있지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다고 한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조석을 일으키는 힘은 지구 밖에 존재하는 우주적인 것으로, 지구의 모든 부분에 똑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떤 장소에서 일어나는 조석의 성질은 국지적인 문제로, 거리가 조금만 떨어진 곳에서도 (조석간만의 규모와 리듬 등이) 놀라울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p.220) 그러니까 동해와 황해의 조차가 차이나는 까닭은 두 바다의 수심과 해저나 연안 지형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황해는 수심이 얕아서 조석간만의 차가 크다고 배웠는데 — 태평양의 조석파가 수심이 얕은 바다로 들어오면 그 파장이 짧아지게 되는데, 긴 파장 안에 있었던 에너지가 짧은 파장 안에 응축되면 에너지 밀도가 높아져서 그 파고, 즉 조차가 커지게 되는 거란다. 게다가 황해는 태평양을 향해 넓게 열려 있어서 대양의 조석 에너지의 유입량 자체도 많단다. 또한 태평양 조석파의 주기와 황해의 고유 진동주기와 거의 일치해 공명共鳴 효과(지난번 책갈피에서 중요했던)도 있다 하고,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을 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석은 천체들 사이 힘들과 지구의 국지적 특성들이 어우러져 일어나는 매우 복잡하고 매우 매우 매혹적인 커뮤니케이션. 


두 번째 책갈피는 이런 조석의 리듬을 체화한 생물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모든 생물이 그런 생물일 거다. 기조력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에 작용하는데다 생물의 몸은 많은 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뿐 아니라 지구 생명은 바다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오래 살았으니까 다들 어딘가에 바다의 기억이 각인돼 있을 거다. 인간 역시 의식하진 못해도 이 리듬을 ‘알고, 기억하고’ 있다. 숨과 피와 잠의 리듬으로. (대표적인 게 여성의 월경 주기. “저녁형 인간”에게 이 리듬이 좀더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루나틱lunatic이나 늑대인간과도 연관이 되겠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 콘볼루타 로스코펜시스(Convoluta roscoffensis)는 이 바다의 리듬을 보다 강하게 체화한 듯한 초록 벌레다. 어떻게? 녹조류와의 “공생共生”으로.(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라는 책에서도 이 콘볼루타가 소개된다. 인터넷에 사진들이 꽤 많이 떠 다니니 검색해보자. "Roscoff worm", "mint-sauce worm" 등으로도 불리고, 학명은 “Symsagittifera roscoffensis”)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조석과 생물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특징도 없이 아주 작은 편평한 몸을 가진 지렁이류인 콘볼루타 로스코펜시스(Convoluta roscoffensis)이다. 이 동물은 브리타니 북부와 채널 제도의 모래 해변에 산다. 콘볼루타는 녹조류와 놀라운 공생 관계를 맺고 사는데, 녹조류 세포가 콘볼루타의 몸 속에 들어가 살기 때문에 그 조직은 녹색을 띠게 된다. 콘볼루타는 공생 관계인 식물이 만들어 내는 녹말을 먹고 사는 영양 섭취 방법에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소화 기관이 퇴화해 버렸다. 녹조류 세포가 광합성(햇빛이 필요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콘볼루타는 썰물이 빠지자마자 조간대(간만 사이의 해안)의 축축한 모래에서 밖으로 나오는데, 이 때 모래 바닥에는 수천 마리의 콘볼루타로 이루어진 커다란 녹색 얼룩이 곳곳에 나타난다. 물이 빠진 몇 시간 동안에 콘볼루타는 이렇게 햇빛 아래에 나와 있고, 그 동안에 식물은 녹말과 당을 만든다. 그러나 밀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면, 콘볼루타는 파도에 휩쓸려 깊은 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다시 모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콘볼루타의 삶은 조석 주기에 따라 썰물 때에는 햇빛을 받기 위해 위로 올라가고, 밀물 때에는 모래 속으로 들어가는 행동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콘볼루타의 행동 중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한 해양생물학자가 어떤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콘볼루타 군집 전체를 실험실로 옮긴 적이 있다. 그 곳의 수족관에는 조석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콘볼루타는 매일 두 번씩 수족관 바닥의 모래 위로 올라와 햇볕을 쬐었다. 그리고 매일 두 번씩 다시 모래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뇌나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심지어 분명한 지각조차 할 수 없는 콘볼루타가 이질적인 장소에서도 그 작은 녹색 몸의 모든 신경 섬유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의 조석 리듬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이충호 옮김, 양철북(2017), p.235~236

(발췌/코멘터리: 현지예)

* <바다책_갈피>는 “바다숲 알리기”의 일환으로, 관련 책에서 발췌한 구절을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의 숲에서 바다, 섬, 바다숲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건져서 올립니다.


첫 갈피는 ‘조석潮汐’ 에 관한 이야기. 조석은 하루에 두 번씩 바다가 들고 나면서(밀물과 썰물) 해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상이다. 흔히 지구와 달 사이 인력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거기에 지구와 태양 사이 인력, 그리고 지구와 달의 공동 무게중심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 때 생기는 원심력 등이 어우러진 힘이 바다를 움직이는 기조력이다. 달은 태양과 비교해서 그 질량은 한참 작지만 이 영향을 능가할 정도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지구 조석에 끼치는 영향력이 태양의 배 이상 크다.(만유인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니까. (몸이 멀어지면 관계는 급속히 멀어진다네))


그런데 이 조석이 지구에 바다가 생기기 전에, 달이 생기기도 전에 벌써 있었다고 한다! 지구가 생겨나 식어가던 시절, 갓난아기 두개골처럼 따끈따끈하고 말캉말캉했던 지표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꾸울렁 꾸울렁했던 것. 지구가 냉각되고 지각이 단단해져가면서 그 정도가 약해졌겠다 싶은데, 어떤 지구인들은 그러기 전에 이 꿀렁임이 점점 더 거대해지다가 지표 일부분이 떨어져나가버리는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태양에 의한 조석도 주기가 있고 지구 자체도 자유 진동 주기 라는 게 있는데(모든 것이 그 고유한 진동 주기가 있다. 대개 단단한 것은 덜 진동하고 유동체는 더 진동한다. 어린아이들이 주변에 쉽게 동조되듯 이때 지구는 아직 굳지 않은 반유동체 상태였으니..), 이 두 주기가 근접하다가 일치하면서 조석의 운동량과 속도가 엄청나게 증폭되어갔던 것이다. 바로  ‘공명共鳴’ 현상. 그렇게 태양쪽으로 무섭게 솟구쳐오르던 지표가 한계에 이르러 쯔억- 하고 떨어져나가버렸단다! 너무 가까운 관계에서 가슴 한쪽이 찢겨나가버리는 일이 있듯이 — 이를테면 오랫동안 뱃속에서 꿀렁이던 태아가 어미 몸 밖으로 떨어져나오듯이.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지구는 그렇게 달을 낳았다. 그리고 그 떨어져나간 상처자리가 지금의 태평양이다. 


하나의 가설이지만 멋진 이야기다. 관계에 의해 자기를 잃고, 그 상실을 통해 전혀 새로운 관계/시스템/한때가 탄생하는 이야기. 아기가 ‘한동안’ 엄마 주변을 맴돌듯 달이 지구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겠다. 지구를 은근 일렁이게 하면서. 실제로 관측에 따르면 달은 1년에 4cm씩 지구에서 멀어진다고 한다. 원래 태양으로 가고 싶었으니.



새로 생긴 지구에는 바다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조석이 일어났다. 태양의 중력에 끌리는 지표면의 용융 액체는 조석을 일으키며 솟아올라 지구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러한 조석은 지각이 냉각되며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점점 정도가 약해졌다. 달이 지구의 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지구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굽이치는 점착성 액체 조석의 속도와 운동량이 커져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높이로 치솟게 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렇게 거대한 조석을 일으킨 힘은 공명 효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에 태양 조석의 주기는 액체 지구의 자유 진동 주기에 접근하다가 일치했다. 그래서 모든 태양 조석은 지구의 진동에서 더 큰 운동량을 얻었고, 하루에 두 차례씩 일어나는 각각의 조석은 바로 그 앞에 일어난 것보다 더 커졌다.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괴물처럼 점점 커져가는 조석이 500년 동안 계속되면, 태양을 향하고 있는 쪽의 조석이 너무 높이 솟아오른 나머지 불안정해져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계산했다. 그렇지만 새로 생겨난 위성은 곧바로 물리학 법칙에 따라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보는 달이 생겨난 것이다. 


지구의 지각이 반액체 상태일 때가 아니라 약간 굳어진 상태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지구 표면에는 지금도 거대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상처자리가 바로 태평양이다. 일부 지구물리학자들은 태평양 바닥이 지구의 중간층을 이루는 물질인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다른 대양들은 맨 바깥층을 이루는 주요 물질이 얇은 화강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태평양의 화강암층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달이 생길 때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 달의 평균 밀도는 지구보다 훨씬 작은데(5.5에 비해 3.3), 이것은 달이 지구의 무거운 철질 핵 물질을 하나도 포함하지 않고, 바깥층의 화강암과 일부 현무암만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이충호 옮김, 양철북(2017), p.28~29

(발췌/코멘터리: 현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