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특별칼럼] "서해의 자연이 준 보물, 신안의 소금"

2021-07-08

고영_음식문헌연구자


대한민국(大韓民國) 전라남도(全羅南道) 신안군(新安郡)에 자리한 한국 최대의 단일 천일염전인 태평염전(太平鹽田)과 소금박물관 그리고 염생식물원탐방로(鹽生植物園探訪路)를 돌아보려면 먼저 증도(曾島)로 들어가야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신안군 증도면(曾島面)이다. 증도는 조선 시대만 해도, 전라도를 대표하는 큰 고장인 나주(羅州)에 속한 섬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증도와 신안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또 농어업을 영위하기 위해 나주뿐 아니라, 예전 나주에 속한 목포(木浦) 및 무안(務安) 지역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살아간다.

지도만 놓고 보면, 신안군은 한반도에서도 남서쪽으로 쏠린 곳이며 해안에서도 끝자락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한국고속철도(韓國高速鐵道, KTX, Korea Train Express)가 있다. 한국고속철도는 서울 용산역에서 목포역까지 승객을 2시간 30분 만에 데려다 준다.


목포역 앞에서 맞은 이른 아침

취재를 위해 모인 일행이 목포행 열차에 오른 시각은 오전 5시 20분. 객차에서 취재 수첩과 장비를 다시 살피고 차 한 잔 마시는 사이 열차는 오전 7시 50분, 정확히 목포역에서 승객을 내려준다. 진동도 소음도 별로 없이 우리를 데려다 준 고속열차를 내리면서 사람이 걷거나, 말을 타고 하던 여행을 떠올린다. 옛 한국의 군(郡)이란 사람이 아침에 걸어서 집을 나섰다가, 적어도 자정 이전에 내 발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쯤의 거리를 기준으로 한 일상생활에서 나온 행정구역이다. 도보 여행자에게 하천과 거친 산자락은 교통의 큰 제약이었다. 뱃길 또한 고단하고 위험했다. 하지만 오늘날 고속철도와 승용차뿐 아니라, 해안과 가까운 웬만한 섬은 대개 연륙교(連陸橋)가 놓여 실제로는 뭍과 다름없는 환경이 되었다.

신안군도 그렇다. 신안군은 옛 나주와 목포, 그리고 무안의 해안과 섬이 새로운 교통 환경을 맞아 20세기에 새로이 태어난 행정구역으로, 목포역에서 승용차만 빌리면 멀리서 온 여행객 누구라도 연륙교로 연결된 섬을 배 한 번 타지 않고 다닐 수 있다. 증도 또한 연륙교가 놓인 섬이다.

 

뱃사람의 아침

예약한 대로 승용차를 찾은 일행은 지역의 공기를 더 깊이 마실 겸 “아침 식사 됩니다”를 써 붙인 소박한 음식점에 들어선다. 역시 목포는 항구다. 새벽에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중년 사내들이 생선찌개에 소주를 비우고 있다. 귀기울여 듣지 않아도 지금 소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직업을 알 수 있다. 사내들은 유쾌하게 소주를 비우며 뱃일의 피로를 푸는 중이다. “딱 한 병만 마시고 푹 자자고!”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 수만큼 밥상에 소주병이 서 있다. 그 “딱 한 병”이란 저마다 한 병일 테다.

“많이는 안 돼. 한숨자기 좋을 정도로만 마셔.”

유쾌한 뱃사람 하나가 동료의 과음을 말리며 우리 일행 앞으로 물과 반찬을 나른다. 주방의 찬모는 마침 싱싱한 생태가 들어왔다며 생태찌개를 권한다. 찌개가 끓는 동안 나온 찬기에는 톳무침과 게장이 올랐다. 여행지의 맛이 궁금한 나그네들이 체면 차릴 것 없이 반찬에 젓가락을 댄다. 톳무침을 씹는 순간 입안으로 왈칵, 기분 좋은 바닷내가 밀려든다. 톳에다는 가늘게 채친 홍고추와 언뜻 보이는 정도로만 섞은 콩나물로 빨강과 노랑을 더했다. 게젓에서는 공장에서 나온 양조간장과는 확연히 다른 전통 간장의 풍미가 가득하다. 씹으면 게살의 감칠맛을 쥔 짠맛이 단맛에 앞선다. 서울에서 먹는, 이른바 깔끔한 게젓의 풍미하고는 전혀 다른 묵직한 느낌, 혀를 강하게 움켜쥐다 사라지는 풍미의 게젓이다. 단맛이 다 가리지 않은 게의 향도 강하다. 문득 씩 웃으며, 일행 가운데 청년의 얼굴을 쳐다본다.

“게장 어때요?”

그는 별 말 없이 씩 웃을 뿐이다. 아직 해초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톳, 서울 출신 젊은이한테는 낯설게 마련인 전통 한국 간장에 재운 게장이 아침인사였다. 씹을수록 생선 특유의 단맛이 잇새에 감도는 생태 또한 우리가 지금 바다 가까이 왔음을 일깨운다.

 

증도는 육지다

밥상에서 일어서기 전, 일행은 서해안고속국도에서 갈라진 지선(支線)과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의 위치를 확인한다. 증도로 들어가려면, 목포에서 일단 신안군청이 자리한 압해도(押海島)를 지나야 한다. 압해도는 1970년 문단에 나온 이래 오늘날까지도 왕성하게 시를 쓰고 있는 노향림(盧香林) 시인에게 시심을 불어넣은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병약하고 외롭던 어린 시절을 압해도에서 보냈다. 압해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고통과 외로움을 딛고 시인이 되었다. 노향림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시인은 또한 압해도를 일러, 신안의 섬과 섬을 일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날따라 압해도에서 증도까지는 한 치 앞에 보이지 않는 두터운 안개가 자욱했다. 오전 내내 바다와 섬은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증도대교를 건널 즈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안개가 걷힌다. 이윽고 저 멀리로 온 땅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거대한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증도다. 거대한 태평염전이 눈앞이다.

 

한국 천일염전의 역사와 증도

한국 천일염전은 최근 백 년 사이에 새로 생긴 산업 현장이다. 20세기 전까지 한국인은 구운 소금을 먹었다. 굽는다니? 바닷물을 받아, 염도를 높인 뒤에, 쇠솥 또는 흙솥에 불을 지피고 염도 높인 물을 끓여 소금 결정을 받는 방식이다. 이렇게 만든 소금을 ‘자염(煮鹽)’ 또는 ‘화염(火鹽)’이라고 한다. 일본식 어휘로는 ‘전오염(煎熬鹽)’이다.

‘구울 자(煮)’, ‘불 화(火)’, ‘달일 전(煎)’, ‘볶을 오(熬)’, 한자를 통해 드러나지만, 자염(또는 화염, 전오염)이란 불을 때 소금 결정을 받는 행위가 핵심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소금을 굽는다”라고 했다. 그러다 1900년대 중반 이후, 산업혁명의 막차를 탄 일제는 공업용으로도 식용으로도 막대한 소금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일제는 연료를 쓰지 않으면서도 대량으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천일제염(天日製鹽) 기술 습득과 생산지 확보에 목말랐다. 일제는 1895년 대만을 할양받은 뒤 대만의 천일염전 조성 기술과 천일염 제법을 흡수한다. 1905년부터는 한반도 해안에 대단위 천일염전을 조성할 계획을 구체화한다. 일제의 판단으로는, 한반도 경기만 이북 서해안 곳곳이 천일염전을 만들기에 좋아 보였다. 더구나 오늘날의 평안남도(平安南道) 광량만(廣粱灣)은 최적지였다. 이곳은 만의 어귀의 너비가 0.5km에 지나지 않지만 해안선의 길이는 39.3km나 되는 곳으로 간석지가 평평하고도 넓게 펼쳐져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평안남도 평균 강수량보다 적은 700mm이다. 연평균 풍속은 4m/s로 증발량이 강수량의 거의 두 배나 되는 곳이다.

일제는 1909년부터 1944년에 걸쳐 꾸준히 광량만 염전을 확대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천일염전은 낯선 산업시설이었다. 조선인 노동자 모집이 어렵다고 판단한 당국은 중국 산동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를 수입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한반도 천일염의 역사는, 일제의 기획으로, 한국 땅에서, 대만의 기술과, 중국 대륙의 노동력이 동원되어 시작된 역사이다.

 

소금박물관 그리고 태평염전

연료가 들지 않아 저렴한 천일염은 자염을 빠르게 대체했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대규모 천일염전은 인천(仁川) 이북 서해안에 집중되었다. 그때까지 신안, 증도 쪽에는 천일염전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남북 간의 긴장이 높아진 끝에 남북교역이 끊기자 남한의 천일염전 조성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1947년 광량만 염전 출신들이 신안군 비금도(飛禽島)에 처음으로 천일염전을 만든다. 이후 대규모 천일염전에서 기술과 관리 경험을 익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신안으로 모여들었다. 태평염전 또한 그렇게 시작된 염전이다. 한 사람 두 사람이 시작한 염전은 1953년 회사 형태로 체계를 잡아 오늘날 ㈜태평소금, 태평염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소금만 해도 연간 1만6천 톤에 달한다.

천일염전의 역사, 그리고 천일염에 얽힌 증도와 신안의 역사를 보는 데 증도에 자리한 소금박물관만한 곳도 없다. 박물관은 140만평 규모의 한국 최대의 염전인 태평염전 입구에 자리한다. 박물관 건물 또한 1950년대 이전의 석조 소금창고를 리모델링한 것으로, 태평염전과 더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소금박물관은 “모든 생물은 생명이 시작된 바다를 기억하고 있다”는 핵심 주제 아래 경제사, 기술사, 사회사, 예술과 신화 들을 아우르는 전시를 보여준다. 박물관 바깥으로 나오면 바로 옥외의 염생식물원탐방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수 년째 태평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조영랑 대리는 이렇게 말한다.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죠? 천천히 걷기에 이보다 좋은 곳도 없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혼자서 걸으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한테 권하고 싶어요. 박물관, 염생식물원탐방로, 염전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소금 얻는 노력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죠. 소금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2도쯤 염도의 물을 23도까지 농축해서, 거기서 소금 결정을 받기까지 한 달은 걸립니다. 걸으며 그 한 달의 인내를 느낄 수 있는 곳, 짠물에서 살아남는 퉁퉁마디(鹹草, Salicornia europaea)를 바라보며 ‘퉁퉁마디 같은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염생식물원탐방로 그리고 겨울에 봄을 기다리는 염전

소금박물관을 나오니 툭 터진 벌판이 펼쳐진다. 탐방로는 갯벌 위로 구불구불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여기저기로 뻗어 있다. 역시 겨울이다. 모두 70여 종의 염생식물이 자라고 있다지만 겨울바람 아래 퉁퉁마디와 칠면초(七面草, Suaeda japonica), 그리고 갈대와 비슷한 여러해살이 풀인 띠(Imperata cylindrica var. koenigii)가 있던 흔적쯤이 보인다. 색채가 살아나는 때는 5월부터이다. 5월이 되면 칠면초가 이곳을 붉게 물들인다. 이윽고 띠의 꽃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여름에는 숲의 풀빛과 다른 염색식물군의 짙은 풀빛이 장관을 이룬다. 지금은 그때를 기다리며 식물도 쉬는 때이다. 염전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천천히 걷는 겨울 바닷가의 운치는 한층 더하다.

“완전히 언 염판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작업은 없어요.”

이곳에서 일한지 10년을 훌쩍 넘긴 김치영 차장이 일행을 안내하다 찬바람 몰아치는 텅 빈 겨울 염전을 바라보며 말한다. 천일염전은 원료가 되는 바닷물을 담아두는 저수지, 그 바닷물을 농축해 염도를 높이는 증발지, 농축한 짠물에서 소금을 분리해 내는 결정지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사람이든 저수지든 증발지든 결정지든 정비하고 쉬어야죠. 쉬는 동안 염전의 수평을 다시 잡고, 무너진 염전의 둑을 성형하고 보수해야죠. 태평염전은 4월 초에서 9월 말 사이가 소금을 내는 때고,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생산을 준비하는 때에요.”

지난 여름 옥외 노동의 흔적이 남았는지, 아직도 그을린 얼굴 위로 사람좋은 웃음이 피어나는 김 차장이 소금창고 문을 열며 설명을 잇는다.

“그래도 먹을거리 가운데 없어서 안 될 게 소금인데, 이 소금 일이 ‘3D’ 가운데서도 제일 힘들지 않소. 와서 보시고, 힘든 줄을 알고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나는 좋아요. 바닷물을 끓어들일 때, 사람이 수차 밟다가, 어느새 5마력 경운기 엔진 동력으로 바뀌었지... 그러다 전기 모터, 그러다 수중 펌프로 동력이 바뀌었지만 ‘3D’ 중에서도 제일 힘든 일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거나 알아줘요.”

소금창고가 열리자 햇빛에 빛나는 백색 무더기가 보는 이 앞으로 훅 뛰어 들어오는 것만 같다. 이 선명한 백색 소금이 한 해 애써 받고 모은 소금이다. 천일염전의 소금은 기온, 햇빛, 바람, 그리고 사람의 노동과 관리가 맞아떨어질 때에만 제대로 결정을 맺는다. 김 차장에 따르면 해만 쨍쨍 난다고 소금을 제대로 받는 것도 아니란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6월 소금이 참 좋다고 한다. 비가 온 다음에는 소금발(결정의 가늘고 굵은 정도)이 굵어진다. 결정의 굵기 또한 인력으로 어찌되는 것이 아닌데, 전국적으로는 소금발에 대한 선호도에서도 차이가 컸다고 한다. 요즘은 아주 차이가 나지도 않지만, 예전에는 경상도에서는 우박처럼 굵은 발을 좋아하고, 충청도에서는 중간보다 가는 발을 좋아하고, 서울에서는 중간보다 조금 큰 발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참 소금창고를 둘러보던 김 차장이 염전을 새삼스레 돌아보며 천천히 설명을 덧붙인다.

“내년 1월이 오면 증발지를 갈고, 또 그걸 평평하게 수평을 잡고, 그걸 또 롤러로 다지는 작업을 시작해야죠.”

 

오수에서 깨어나 뒷산을 오르다

찬바람 잔뜩 쐰 일행이 몸을 녹일 겸 찾아든 곳은 소금동굴힐링센터이다. 실내를 인공 소금동굴로 꾸민 공간이다. 벽과 바닥과 천장을 모두 이곳에서 생산한 소금으로 덮어 그야말로 동굴을 이루고 있다. 조도 낮은 푸른 조명이 편안하고, 졸졸 흐르며 들리는 물소리에 한결 마음에 편안해진다. 옷을 입은 채로, 소금 바닥 위에 놓은 소금 침대에 눕는다. 아차, 잠깐 사이에 깜빡 졸았다. 짧은 오수 뒤가 개운하다.

다시 다리에 힘이 붙는다. 더 늦기 전에 모두들 꼭 들르라고 추천한 경관의 명소 소금밭전망대를 오른다. 전망대라고 했지만 전형적인 한국의 마을 진산(鎭山)의 머리에 자리한다. 해발 약 50미터를 천천히 오르는 재미가 있다. 장년 남성 걸음으로 약 7분, 목재 데크를 깐 전망대에 서 아래를 바라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이제야 눈에 그 윤곽이 들어온다. 태평염전의 규모를 한마디로 말해, 서울 여의도의 약 2배 규모란다.

사람의 힘, 문명의 힘으로 이룬 둑 옆으로 바다와 갯벌이 어른댄다. 지는 해 받은 빈 염전은 눈이 아릴 정도로 반짝인다. 염전의 둑 위로, 염판 위로 빛이 부서진다. 멀리 보이는 증도대교 또한 운치를 더한다. 연륙교가 없었다면 오늘처럼 안개 짙은 날, 우리는 증도에 들어올 수 없었을 테지. 바로 여기다. 나그네에게 신안, 증도의 경관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곳이 소금밭전망대이다. 일행은 입을 딱 벌린 채로 하염없이 벌판과 갯벌과 바다를 바라본다. 사람이란 자연과 문명 사이에 서 있는 존재임을 실감한다. 그렇게 하루짜리 신안 증도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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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2020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 All rights reserved.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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